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2022/11 23

7월의 종교 / 정와연

그림 / 김소영 7월의 종교 / 정와연 ​ 칠월, 콩밭에 무릎을 꿇고 어머닌 기도중이다 늙어 쭈그려 앉기 힘든 무릎 그 무릎을 꿇고 콩밭을 맨다 넓고 긴 고랑은 한여름 고난의 십자가 푸른 강대상 앞에 땀을 뚝뚝 흘리는 기도다 잡초를 매고 북을 돋우고 순을 자르며 온몸으로 흘리는 기도 밭고랑은 어머니의 종교다 무릎을 혹사당한 예배다 꿈속에서 종소리를 들었는지 새벽잠 깨워 나서는 어머니의 예배당 개척교회 목사님이 심방을 오시는지 무릎 꿇고 엎드려 하루 종일 청소중이다 뿌리가 박테리아와 어머니의 기도가 공생하는지 어머니의 기도를 빨아들이고 남은 기도를 저장한 뿌리혹주머니가 우툴두툴하다 칸칸이 맺힌 잘 여문 콩알들은 어머니 땀방울이고 무릎 닳은 기도의 응답이다 그래서 몇 년 묵은 장맛은 헌신한 무릎의 맛이 난다..

발자국은 길을 묻지 않는다 / 정경이

그림 / 정진경 신춘당선작 발자국은 길을 묻지 않는다 / 정경이 우항리에서 그곳에 가면 싱싱한 그리움의 지느러미를 달고 있는 발자국을 신어 볼 수 있다 따뜻한 햇살이 발등을 콕콕 쪼는 해변을 따라 달려 가다 보면 손톱만한 꽃들이 까르르르 하얀 웃음 흩뿌리고 갈대들이 뒷걸음질치며 다정하게 손 흔드는 호숫가, 생기 넘치는 풍경 들은 여러 장의 궁금증을 복사한다 궁금증을 살짝 들추면 잔물결이 발을 간지럽히는데도 웃음을 참고 발자국 걸어나온다 그런데 누가 저렇게 헐렁한 신발을 신고 다녔을까 바위에 박힌 발자국은 서로 부서지지 않기 위해 촘촘히 껴안고 있다 1억년이 넘도록 흐트러 지지 않은 발자국의 깊이만큼 두꺼운 사랑, 껴안고 돌이 된 채로 백열등 만한 심장을 찾아 환하게 불 밝히고 있을 심장을 찾아 헤맸는지도..

새에게 묻다 / 정호승

그림 / 남복현 새에게 묻다 / 정호승 사람들이 자꾸 나를 바보라고 한다 나는 내가 정말 바보인지 너무 궁금해서 우리집 아파트 베란다 헌식대에 모이를 주다가 어린 새에게 물어보았다 내가 정말 바보냐고 새가 물 한모금 입에 물고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다가 웃으면서 말했다 바보라고 나는 비로서 내가 바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새들과 함께 맛있게 모이를 쪼아 먹기 시작했다 정호승 시집 / 슬픔이 택배로 왔다

'하나'를 음미하다 / 유안진

그림 / 김상덕 '하나'를 음미하다 / 유안진 올리버 크롬웰은 한 표 차이로 영국의 통치권을 장악했고(1645) 영국 왕 찰스 1세는 한 표 차이로 처형당했고(1649) 한 표 차이로 미국의 헌법 조문의 국어는 독일어 아닌 영어로 결정되어(1776), 오늘에 이르렀고 프랑스는 한 표 차이로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바뀌었고(1875) 아돌프 히틀러는 한 표 차이로 나치당을 장악했다지(1923) 명함 대한민국(大韓民國) 김관식(金冠植) 시인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 딱 한 표를 얻었는데, 어떻게 자기 남편을 안 찍을 수 있느냐는 시인에게, 부인 방 여사는 "아무나 국회의원 되면 나라 꼴이 어찌 되겠나? 싶어서"라고 대답했다는 일화도 남겼지(1960) "미스 유, 여기 앉아요" 자기 자리를 내준 그 말 한마디가..

심장을 켜는 사람 / 나희덕

그림 / 김채영 심장을 켜는 사람 / 나희덕 심장의 노래를 들어보실래요? 이 가방에는 두근거리는 심장들이 들어 있어요 건기의 심장과 우기의 심장 아침의 심장과 저녁의 심장 두근거리는 것들은 다 노래가 되지요 오늘도 강가에 앉아 심장을 퍼즐처럼 맞추고 있답니다 동맥과 동맥을 연결하면 피가 돌 듯 노래가 흘러나오기 시작하지요 나는 심장을 켜는 사람 심장을 다해 부른다는 게 어떤 것인지 알 수 없지만 통증은 어디서 오는지 알 수 없지만 심장이 펄떡일 때마다 달아나는 음들, 웅크린 조약돌들의 깨어남, 몸을 휘돌아나가는 피와 강물, 걸음을 멈추는 구두들, 짤랑거리며 떨어지는 동전들, 사람들 사이로 천천히 지나가는 자전거바퀴, 멀리서 들려오는 북소리와 기적소리, 다리 위에서 노래를 부르는 동안 얼굴은 점점 희미해지..

오늘의 의상 / 정지우<2013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그림 / 조연수 오늘의 의상 / 정지우 ​​ 성당의 느티나무 그늘이 무더위에 끌리고 있다 팔랑거리는 양떼들을 데리고 계절 속으로 입성하려면 가벼운 체위는 가리고 고딕의 시대를 지나야 한다 폭염은 언덕에 한낮으로 누워 있다 구름의 미사포를 쓰고 그늘을 숙이던 오후는 초록의 전례를 들려주더니 밀빵을 혀에 얹고 한동안 입들이 닫혀 있을 것이다 종탑에는 귀머거리 새가 종소리를 둥지로 삼아 살고 있다 회색을 입고 묵상에 잠긴 성전엔 돌기둥을 돌던 저녁의 의복이 걸쳐져 있다 미사의 요일엔 검은 머리카락을 버리고 히브리어를 닮은 숟가락으로 점심을 먹는다 오늘의 드레스코드는 디저트가 없는 주일 맛 나는 테이블 중세의 햇빛이 스테인드글라스로 들어오는 창문 귀가 잘려진 무늬에선 단풍잎 맛이 나는 오래된 말들이 달그락거린다..

모닥불 / 정호승

그림 / 심승보 모닥불 / 정호승 강가의 모닥불 위에 함박눈이 내린다 하늘의 함박눈이 모닥불 위에 내린다 모닥불은 함박눈을 태우지 않고 스스로 꺼진다 함박눈은 모닥불에 녹지 않고 스스로 녹는다 나는 떠날 시간이 되어 스스로 떠난다 시간도 인간의 모든 시간을 스스로 멈춘다 이제 오는 자는 오는 곳이 없고 가는 자는 가는 곳이 없다 인생은 사랑하기에는 너무 짧고 증오하기에는 너무 길다 정호승 시집 / 슬픔이 택배로 왔다

아무 다짐도 하지 않기로 해요 / 유병록 (천상병 시 문학상 23회)

그림 / 강애란 아무 다짐도 하지 않기로 해요 / 유병록 ​ 우리 이번 봄에는 비장해지지 않기로 해요 처음도 아니잖아요 ​ 아무 다짐도 하지 말아요 서랍을 열면 거기 얼마나 많은 다짐이 들어 있겠어요 ​ 목표를 세우지 않기로 해요 앞날에 대해 침묵해요 작은 약속도 하지 말아요 ​ 겨울이 와도 우리가 무엇을 이루었는지 돌아보지 않기로 해요 봄을 반성하지 않기로 해요 ​ 봄이에요 내가 그저 당신을 바라보는 봄 금방 흘러가고 말 봄 ​ 당신이 그저 나를 바라보는 봄 짧디짧은 봄 ​ 우리 그저 바라보기로 해요 ​ 그뿐이라면 이번 봄도 나쁘지는 않을 거예요 유병록 시집 / 아무 다짐 않기로 해요 .

그 웃음을 나도 좋아해 / 이기리

그림 / 안려원 그 웃음을 나도 좋아해 / 이기리 마침내 친구 뒤통수를 샤프로 찍었다 어느 날 친구는 내 손목을 잡더니 내가 네 손가락 하나 못 자를 것 같아? 커터 칼을 검지 마디에 대고 책상에 바짝 붙였다 친구는 나의 손가락을 자르지 못했다 검지에는 칼을 댄 자국이 붉게 남았다 내 불알을 잡고 흔들며 웃는 아이들의 모습이 유리문에 비쳤다 엎드려 자고 있을 때 뒤로 다가가 포옹을 하는 뒷모습으로 옷깃을 풀고 가슴 속으로 뜨거운 우유를 부었다 칠판에 떠든 친구들을 적었다 너, 너, 너 야유가 쏟아졌다 지우개에 맞았다 불 꺼진 화장실에서 오줌을 쌀 때마다 어둠 속에서 어떤 손아귀가 커졌고 천장을 뚫고 들어오는 수십 개의 검지가 이마를 툭툭 종례 시간이 끝나도 다행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선생님이 나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