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문학이야기/명시

그 웃음을 나도 좋아해 / 이기리

푸른 언덕 2022. 11. 4. 15:17

 

그림 / 안려원

 

 

 

 

그 웃음을 나도 좋아해 / 이기리

 

 

 

마침내 친구 뒤통수를 샤프로 찍었다

어느 날 친구는 내 손목을 잡더니

내가 네 손가락 하나 못 자를 것 같아?

커터 칼을 검지 마디에 대고 책상에 바짝 붙였다

친구는 나의 손가락을 자르지 못했다

검지에는 칼을 댄 자국이 붉게 남았다

내 불알을 잡고 흔들며 웃는 아이들의 모습이 유리문에 비쳤다

엎드려 자고 있을 때

뒤로 다가가 포옹을 하는 뒷모습으로

옷깃을 풀고 가슴 속으로 뜨거운 우유를 부었다

칠판에 떠든 친구들을 적었다

너, 너, 너

야유가 쏟아졌다

지우개에 맞았다

불 꺼진 화장실에서 오줌을 쌀 때마다 어둠 속에서 어떤 손아귀가 커졌고

천장을 뚫고 들어오는 수십 개의 검지가 이마를 툭툭

종례 시간이 끝나도

다행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선생님이 나를 끌어안았다

선생님에게 장래 희망을 말했다

저녁을 먹고 혼자 시소를 타면

하늘이 금세 붉어졌고

발끝에서 회전을 멈춘 낡은 공 하나를

두 손바닥으로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진흙이 지구처럼 묻은

검은 모서리를 가진

낮과 밤의 길이가 같아진다는 건

세상으로부터 주파수가 맞춰지는 느낌

이제 다른 행성의 노래를 들어도 될까

정말 끝날 것 같은 여름

구름을 보면

비를 맞는 표정을 지었다

 

 

 

 

 

* 출처 제39회 김수영 문학상 <이기리 시인>

 

 

 

 

 

 

 

 

 

'문학이야기 > 명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모닥불 / 정호승  (15) 2022.11.06
아무 다짐도 하지 않기로 해요 / 유병록 (천상병 시 문학상 23회)  (17) 2022.11.05
메기 / 신동호  (15) 2022.11.03
자화상 / 서정주  (14) 2022.11.02
단풍나무 / 안도현  (19) 2022.1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