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문학이야기/명시

오늘의 의상 / 정지우<2013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푸른 언덕 2022. 11. 7. 19:06

 

그림 / 조연수

 

 

오늘의 의상 / 정지우
<2013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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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의 느티나무 그늘이 무더위에 끌리고 있다
팔랑거리는 양떼들을 데리고
계절 속으로 입성하려면 가벼운 체위는 가리고 고딕의 시대를 지나야 한다


폭염은 언덕에 한낮으로 누워 있다


구름의 미사포를 쓰고 그늘을 숙이던 오후는 초록의 전례를 들려주더니
밀빵을 혀에 얹고 한동안 입들이 닫혀 있을 것이다
종탑에는 귀머거리 새가
종소리를 둥지로 삼아 살고 있다


회색을 입고 묵상에 잠긴 성전엔 돌기둥을 돌던 저녁의 의복이 걸쳐져 있다


미사의 요일엔 검은 머리카락을 버리고 히브리어를 닮은 숟가락으로 점심을 먹는다
오늘의 드레스코드는 디저트가 없는
주일 맛 나는 테이블
중세의 햇빛이 스테인드글라스로 들어오는 창문
귀가 잘려진 무늬에선
단풍잎 맛이 나는 오래된 말들이 달그락거린다


촛대처럼 나무가 자꾸 떨어뜨리는 중얼거림들
대신 읊고 가는 가을 울음소리가 스르르 바닥에 끌린다
계단이나 혹은 의자로 배치되어 있는 한 철을
나는 양치기 소년으로 지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