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문학이야기/명시

물류 창고 / 이수명

푸른 언덕 2022. 11. 27. 20:04

 


그림 / 임영수

 

 

 

 

물류 창고 / 이수명

<2018 김춘수시 문학상>

우리는 물류 창고에서 만났지

창고에서 일하는 사람처럼 차려 입고

느리고 섞이지 않는 말들을 하느라

호흡을 다 써 버렸지

물건들은 널리 알려졌지

판매는 끊임없이 증가했지

창고 안에서 우리들은 어떤 물건들이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으로 갔다가 거기서

다시 다른 방향으로 갔다가

돌아오곤 했지 갔던 곳을

또 가기도 했어

무얼 끌어내리려는 건 아니었어

그냥 담당자처럼 걸어 다녔지

바지 주머니엔 볼펜과 폰이 꽂혀 있었고

전화를 받느라 구석에 서 있곤 했는데

그런 땐 꼼짝할 수 없는 것처럼 보였지

물건의 전개는 여러모로 훌륭했는데

물건은 많은 종류가 있고 집합되어 있고

물건 찾는 방법을 몰라

닥치는 대로 물건에 손대는 우리의 전진도 훌륭하고

물류 창고에서는 누구나 훌륭해 보였는데

창고를 빠져나가기 전에 아무 이유 없이

갑자기 누군가 울기 시작한다.

누군가 토하기 시작한다.

누군가 서서

등을 두드리기 시작한다.

누군가 제자리에서 왔다 갔다 하고

몇몇은 그러한 누군가들을 따라 하기 시작한다.

대화는 건물 밖에서 해주시기 바랍니다.

정숙이라 쓰여 있었고

그래도 한동안 우리는 웅성거렸는데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소란하기만 했는데

창고를 빠져나가기 전에 정숙을 떠올리고

누군가 입을 다물기 시작한다.

누군가 그것을 따라 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조금씩 잠잠해지다가

더 계속 계속 잠잠해지다가

이윽고 우리는 어느 순간 완전히 잠잠해질 수 있었다.

 

 

 

 

*물류창고를 세상으로 보고, 울고 토하는 존재를 시인으로 생각하고 시를 읽어보자

시인은 울고 토하기도 하지만 등을 두둘겨 주는 존재는 독자들이다. 시인은 침묵의 언어도 갖고 있다.

 

 

 

 

 

이수명 시집 / 물류창고 <문학과 지성>

 

 

 

 

 

 

 

 

'문학이야기 > 명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무 도마 / 신기섭  (23) 2022.11.29
꽃 지는 날 / 홍해리  (14) 2022.11.28
화사花蛇 /서정주  (40) 2022.11.23
물의 온도 / 장혜령  (14) 2022.11.22
나무 생각 / 안도현  (19) 2022.1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