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문학이야기/명시

10월 / 기형도

푸른 언덕 2022. 10. 23. 20:41

 

그림 / 안려원

 

 

 

 

10월 / 기형도

 

 

1

흩어진 그림자들, 모두

한곳으로 모이는

그 어두운 정오의 숲속으로

이따끔 나는 한 개 짧은 그림자 되어

천천히 걸어 들어간다

쉽게 조용해지는 나의 빈 손바닥 위에 가을은

둥글고 단단한 공기를 쥐어줄 뿐

그리고 나는 잠깐 동안 그것을 만져볼 뿐이다

나무들은 언제나 마지막이라 생각하며

작은 이파리들을 떨구지만

나의 희망은 이미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너무 어두워지면 모든 추억들은

갑자기 거칠어진다

내 뒤에 있는 캄캄하고 필연적인 힘들에 쫓기며

나는 내 침묵의 심지를 조금 낮춘다

공중의 나뭇잎 수효만큼 검은

옷을 입은 햇빛들 속에서 나는

곰곰이 내 어두움을 생각한다, 어디선가 길다란 연기들이 날아와

희미한 언덕을 만든다, 빠짐없이 되살아나는

내 젊은 날의 저녁들 때문이다

 

한때 절망이 내 삶의 전부였던 적이 있었다

그 절망의 내용조차 잊어버린 지금

나는 내 삶의 일부분도 알지 못한다

이미 대지의 맛에 익숙해진 나뭇잎들은

내 초라한 위기의 발목 근처로 어지럽게 떨어진다

오오, 그리운 생각들이란 얼마나 죽음의 편에 서 있는가

그러나 내 사랑하는 시월의 숲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

 

2

자고 일어나면 머리맡의 촛불은 이미 없어지고

하얗고 딱딱한 옷을 입은 빈 병만 우두커니 나를 쳐다본다

 

 

 

 

기형도 시집 / 입 속의 검은 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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