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2022/09 30

종점의 추억 / 나호열

그림 / 이율 종점의 추억 / 나호열 가끔은 종점을 막장으로 읽기도 하지만 나에게 종점은 밖으로 미는 문이었다 자정 가까이 쿨럭거리며 기침 토하듯 취객을 내려놓을 때 끝내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지만 귀잠 들지 못하고 움츠려 서서 질긴 어둠을 씹으며 새벽을 기다리는 버스는 늘 즐거운 꿈을 선사해 주었다 어디론가 떠나는 것이 얼마나 큰 설렘인가 서강행(西江行) 이름표를 단 버스는 발자국을 남기지 않고 유년을 떠나갔지만 서강은 출렁거리며 내 숨결을 돋우었다 그곳에 가면 아버지를 만날까 이윽고 내가 서강에 닿았을 때 그곳 또한 종점이었음을 알게 되었을 때 내 몸에 잠들어 있던 아버지가 새살처럼 돋아 올랐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내가 말한다 이 세상에 종점은 없다. 나호열 시집 / 눈물이 시킨일

어디 우산 놓고 오듯 / 정현종

그림 / 김명희 어디 우산 놓고 오듯 / 정현종 어디 우산 놓고 오듯 어디 나를 놓고 오지도 못하고 이 고생이구나 나를 떠나면 두루 하늘이고 사랑이고 자유인 것을 시집 /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요즘 비가 참 많이 내렸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가끔 우산을 지하철에 놓고 내리는 버릇도 생겼습니다 핸드폰에 머리를 박고 있다가 "☆☆역입니다" 하면 정신없이 몸만 빠져나옵니다. 그런 날은 영락 없이 우산을 잃어버립니다. 마치 나를 자리에 놓고 내린 듯이 마음이 많이 허전합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애써 자신을 토닥여줍니다 그래, 우산이 손에 없으니 얼마나 자유롭니.... 괜찮아 긍정적으로 마음을 돌려봅니다. 앞으로 살아갈 날들~ 더 많은 것들을 잃어버리면서 살겠지요. 저는 봄에 사랑하는 엄마를 잃어버렸습니다. 이제는..

묶음 / 문 태 준

그림 / 한부열 묶음 / 문 태 준 꽃잎이 지는 열흘 동안을 묶었다 꼭대기에 앉았다 가는 새의 우는 시간을 묶었다 쪽창으로 들어와 따사로운 빛의 남쪽을 묶었다 골짜기의 귀에 두어마디 소곤거리는 봄비를 묶었다 난과 그 옆에 난 새 촉의 시간을 함께 묶었다 나의 어지러운 꿈결은 누가 묶나 미나리처럼 흐르는 물에 흔들어 씻어 묶을 한단 문태준 시집 / 우리들의 마지막 얼굴

폭풍 / 정호승

그림 /정계향 폭풍 / 정호승 폭풍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일은 옳지 않다 폭풍을 두려워하며 폭풍을 바라보는 일은 더욱 옳지 않다 스스로 폭풍이 되어 머리를 풀고 하늘을 뒤흔드는 저 한 그루 나무를 보라 스스로 폭풍이 되어 폭풍 속을 나는 저 한 마리 새를 보라 은사시나뭇잎 사이로 폭풍이 휘몰아치는 밤이 깊어갈지라도 폭풍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일은 옳지 않다 폭풍이 지나간 들녘에 핀 한 송이 꽃이 되기를 기다리는 일은 더욱 옳지 않다 정호승 시선집 / 내가 사랑하는 사람

바람의 바람으로 / 천양희

그림 / 천양희 바람의 바람으로 / 천양희 땅에 낡은 잎 뿌리며 익숙한 슬픔과 낯선 희망을 쓸어버리는 바람처럼 살았다 그것으로 잘 살았다, 말할 뻔했다 허공을 향해 문을 열어놓은 바람에도 너는 내 전율이다 생각하며 길을 걸었다 그것으로 잘 걸었다, 말할 뻔했다 바람 소리 잘 들으려고 눈을 감았다 그것으로 잘 들었다, 말할 뻔했다 바람은 나무 밑에서 불고 가지 위에서도 분다 그것으로 바람을 천하의 잡놈이라, 만할 뻔했다 천양희 시집 / 새벽에 생각하다

사랑이 올 때 / 나태주

그림 / 이인자 사랑이 올 때 / 나태주 가까이 있을 때보다 멀리 있을 때 자주 그의 눈빛을 느끼고 아주 멀리 헤어져 있을 때 그의 숨소리까지 듣게 된다면 분명히 당신은 그를 사랑하기 시작한 것이다 의심하지 말아라 부끄러워 숨기지 말아라 사랑은 바로 그렇게 오는 것이다 고개 돌리고 눈을 감았음에도 불구하고. 나태주 대표시 선집 / 걱정은 내 몫이고 사랑은 네 차지

목마와 숙녀 / 박인환

그림 / 채정원 ​ ​ ​ 목마와 숙녀 / 박인환 ​ ​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거저 방울 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 별이 떨어진다 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숴진다 그러나 잠시 내가 알든 소녀는 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 작가의 눈을 바라다보아야 한다 등대에 불이 보이지 않아도 거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 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

다음 / 천양희

그림 / 안수미 다음 / 천양희 어떤 계절을 좋아하나요? 다음 계절 당신의 대표작은요? 다음 작품 누가 누구에게 던진 질문인지 생각나지 않지만 봉인된 책처럼 입이 다물어졌다 나는 왜 다음 생각을 못 했을까 이다음에 누가 나에게 똑같은 질문을 한다면 나도 똑같은 대답을 할 수 있을까 나는 시인인 것이 무거워서 종종 다음 역을 지나친다 시집 / 새벽에 생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