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게 쓰여진 시 / 서지영 그림 / 윤제우 쉽게 쓰여진 시 / 서지영 유관순 언니의 손톱도 잊었다 15초조차 슬프지 않다 테이블에 먹다 남은 간장치킨이 나뒹군다 온 채널이 먹방이다 바보가 바보 세상에서 똑똑해진다 도대체 배고픔과 피로와 창백함과 허무와 부조리와 pain은 어디에 있나! 아무리 찾아보아도 손톱 밑 가시조차 없다 감각의 제국에 고통은 없다 온통 타이네놀 껍질뿐 하루가 잘 지나간다 시가 아주 쉽게 쓰여진다 서지영 시집 / 이 모든 건 그냥 만들어지지 않는다 문학이야기/명시 2022.09.20
붓을 씻으며 / 김행석 그림 / 이우환 붓을 씻으며 / 김행석 밭을 간 농부가 쟁기를 씻듯 나도 붓을 씻는다 내 맘 깊숙이 낀 때들이 붓을 따라 모두 빠져나가려는지 검은 생각들이 계속 흘러나온다 붓 하나 씻기가 이렇게 어려운데 밥벌이에 찌든 나를 씻는 일은 얼마나 어려울 것인가 화선지를 보니 부끄러운 생각이 든다 문학이야기/명시 2022.09.19
국화빵을굽는사내정호승 그림 / 최은미 국화빵을 굽는 사내 / 정호승 당신은 눈물을 구울 줄 아는군 눈물로 따끈따끈한 빵을 만들 줄 아는군 오늘도 한강에서는 사람들이 그물로 물을 길어 올리는데 그 물을 먹어도 내 병은 영영 낫지 않는데 당신은 눈물에 설탕도 조금은 넣을 줄 아는군 눈물의 깊이도 잴 줄 아는군 구운 눈물을 뒤집을 줄도 아는군 정호승 / 너를 사랑해서 미안하다 문학이야기/명시 2022.09.18
물망초 / 김춘수 그림 / 임동순 물망초 / 김춘수 부르면 대답할 듯한 손을 흔들면 내려올 듯도 한 그러면서 아득히 먼 그대의 모습, -하늘의 별일까요? 꽃 피워 바람 잔 우리들의 그 날, -나를 잊지 마세요. 그 음성 오늘따라 더욱 가까이에 들리네 들리네. 나태주 시집 / 시가 나에게 살라고 한다 문학이야기/명시 2022.09.17
은빛 구 / 강위덕 그림 / 김환기 은빛 구 / 강위덕 은빛 구, 달이 뜨면 피어나는 달 마음처럼 모양이 동그랗다 바람은 고통의 순간을 수제비 구름처럼 몰려다니고 기포 속 은빛 바람은 깊은 바다에서 별이 되어 반짝인다 하늘과 땅 아래서 바람을 옷 입은 은빛 구, 그 속에 시를 생각하면 생은 얼마나 뜨거운 것인가 땀방울로 바다를 채워도 공허한 진실은 시를 보듬고 헤엄쳐 오른다 덩달아 하늘도 낮게낮게 내려온다 강위덕 시집 / 손톱이라는 창문 문학이야기/명시 2022.09.16
기쁨 / 괴테 그림 / 이왈종 기쁨 / 괴테 Die Freuden 우물가에서 잠자리 한 마리 명주 천 같은 고운 날개를 팔랑거리고 있다. 진하게 보이다가 연하게도 보인다. 카멜레온 같이 때로는 빨갛고 파랗게, 때로는 파랗고 초록으로. 아, 가까이 다가가서 그 빛깔을 볼 수 있다면. 그것이 내 곁을 슬쩍 지나가서 잔잔한 버들가지에 앉는다. 아, 잡았다! 찬찬히 살펴보니 음울한 짙은 푸른빛. 온갖 기쁨을 분석하는 그대도 같은 경우를 맞게 되리라. 괴테시집 / 송영택 옮김 문학이야기/명시 2022.09.15
다시 강촌에서 / 박준 그림 / 유영국 다시 강촌에서 / 박준 다시 그를 만나러 갔다 그동안 두 계절이 바뀌었다 가도 가도 넓어져만 가는 강에 더 크고 큰 산이 잠겨 있었다 그에게 물었으나 말이 없었다 그에겐 강폭만큼 여지가 남아 있었다 박준 시집 / 우리들의 마지막 얼굴 문학이야기/명시 2022.09.14
비 그친 새벽산에서 / 황지우 그림 / 이 효 비 그친 새벽산에서 / 황지우 비 그친 새벽산에서 나는 아직도 그리운 사람이 있고 산은 또 저만치서 등성이를 웅크린 채 창 꽂힌 짐승처럼 더욱 김을 뿜는다 이제는 그대를 잊으려 하지도 않으리 산을 내려오면 산은 하늘에 두고 온 섬이었다 날기 위해 절벽으로 달려가는 새처럼 내 희망의 한 가운데는 텅 비어 있었다 황지우 전문 문학이야기/명시 2022.09.13
어머니를 위한 자장가 / 정호승 그림 / 김정수 어머니를 위한 자장가 / 정호승 잘 자라 우리 엄마 할미꽃처럼 당신이 잠재우던 아들 품에 안겨 장독 위에 내리던 함박눈처럼 잘 자라 우리 엄마 산 그림자처럼 산 그림자 속에 잠든 산새들처럼 이 아들이 엄마 뒤를 따라갈 때까지 잘 자라 우리 엄마 아기처럼 엄마 품에 안겨 자던 예쁜 아기의 저절로 벗겨진 꽃신발처럼 정호승 시선집 / 내가 사랑하는 사람 문학이야기/명시 2022.09.12
백지 1 / 조정권 그림 / 김성임 백지 1 / 조정권 꽃씨를 떨구듯 적요한 시간의 마당에 백지 한 장 떨어져 있다. 흔히 돌보지 않는 종이지만 비어 있는 그것은 신이 놓고 간 물음. 시인은 그것을 10월의 포켓에 하루 종일 넣고 다니다가 밤의 한 기슭에 등불을 밝히고 읽는다. 흔히 돌보지 않는 종이지만 비어 있는 그것은 신의 뜻. 공손하게 달라하면 조용히 대답을 내려주신다. 조정권 전문 *이 시는 '신의 뜻에 대한 겸허한 순종'을 권하는 내용이다. 요즘 말로 하면 '마음을 비우기'다. 문학이야기/명시 2022.09.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