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2023/05 28

검은 제비나비 / 송찬호

그림 / 허경애 ​ ​ ​ ​ 검은 제비나비 / 송찬호 ​ ​ ​ 앞으로 저 나비를 검은 히잡의 테러리스트라 부르지 말자 허리에 폭약을 친친 감고도 나비는 세계의 근심 앞에서 저리 가벼이 날고 있지 않은가 ​ 꽃들이 팡팡 터지는 봄날의 오후, 나비는 녹색 전선에 앉았다 붉은색 전선에 앉았다 아찔하게 생의 뇌관을 건드리고 있으니 우리도 꽃시장에서 만날 약속을 하루만 더 미뤄두자 ​ ​ ​ 송찬호 시집 / 분홍 나막신 ​ ​ ​ ​​ ​

푸른 그리움 / 정남식

그림 / 김경민 푸른 그리움 / 정남식 저 넓은 그리움을 어떻게 바라본다 말인가 저 넓은 푸른 그리움을 아무리 붉은 혀의 울음으로 울어도 바다는 푸르기만 하다 푸르름이 나를 절로 설레게 한다 이 푸름은 빛과 시간을 바꿔 가며 제 빛깔을 바꾼다 바다를 바라보면 볼수록 그리움의 그림자는 오, 사라지지도 않지, 수많은 겹의 물살을 치고 있다 물결의 살내를 저미는 갈매기가 이 바다를 다 볼 수 없듯 이 그리움을 다 그리워할 수 없다 그리움의 끝이 어떻게 지워질 것인가 서녘 해거름에 눈빛 빨갛게 물들어 마침내 별빛에 쏘이다가 어둠으로 푸른 어둠으로 내가 지워지기 전까지 정남식 시집 / 입가로 새가 날아왔다

산다는 것 / 이시가키 린

그림 / 박학성 ​ ​ ​ ​ ​ 산다는 것 / 이시가키 린​ ​ ​ ​ 안 먹고는 살 수가 없다. 밥을 푸성귀를 고기를 공기를 빛을 물을 부모를 형제를 스승을 돈도 마음도 안 먹고는 살아남을 수 없었다. 부풀어 오른 배를 안고 입을 닦으면 주방에 널려 있는 당근 꼬리 닭 뼈다귀 아버지 창자 마흔 살 해질녘 내 눈에 처음으로 넘치는 짐승의 눈물. ​ ​ ​ ​ ​ 책 / 시의 힘 현암사 ​ ​ ​​ ​ ​

꽃밥 / 엄재국

이팝나무 ​ ​ ​ 꽃밥 / 엄재국​ ​ ​ 꽃을 피워 밥을 합니다 ​ 아궁지에 불 지피는 할머니 ​ 마른 나무 목단, 작약이 핍니다 ​ 부지깽이 할머니 눈 속에 홍매화 복사꽃 피었다 집니다 ​ 어느 마른 몸들이 밀어내는 힘이 저리도 뜨거울까요 ​ 만개한 꽃잎에 밥이 끓습니다 ​ 밥물이 넘쳐 또 이팝꽃 핍니다 ​ 안개꽃 자욱한 세상, 밥이 꽃을 피웁니다 ​ ​ ​ ​ 시집 / 정끝별의 밥시 이야기 밥 ​ ​ ​ ​ ​ ​

목계장터 / 신경림

그림 / 이미화 ​ ​ ​ ​ ​ ​ 목계장터 / 신경림​ ​ ​ 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되라 하고 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네 청룡 흑룡 흩어져 비 개인 나루 잡초나 일깨우는 잔바람이 되라네 뱃길이라 서울 사흘 목계나루에 아흐레 나흘 찾아 박가분 파는 가을볕도 서러운 방울장수 되라네 산은 날더러 들꽃이 되라 하고 강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산서리 맵차거든 풀 속에 얼굴 묻고 물겨울 모질거든 바위 뒤에 붙으라네 민물새우 끓어 넘는 토방 툇마루 석삼년에 한 이레쯤 천치로 변해 짐 부리고 앉아 쉬는 떠돌이가 되라네 하늘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고 산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 ​ ​ *세속적 가치에 얽매이지 않으려는 시인의 삶의 자세를 자연의 모습에 비겨 표현한 작품이다 ​ ​ 시집 / 우리 시 10..

종이 배를 타고 / 정호승

사진 종이 배를 타고 / 정호승 종이배를 타고 바다로 간다 따라오지 마라 맨발로 부두까지 달려나와 울지마라 종이배는 떠나가는 항구가 없다 슬픈 뱃고동 소리도 울리지 않는다 나를 침몰하기 위해 바다를 향하는 게 아니다 갈매기를 데리고 내 평생 타고 다닌 배가 오직 종이배였을 뿐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바다에도 종이배의 뱃길을 내기 위해 종이배를 타고 먼 바다로 간다 정호승 시집 / 나는 희망을 거절한다

양쪽 귀를 접은 페이지 / 김혜순

그림 / 성기혁 양쪽 귀를 접은 페이지 / 김혜순 엄마, 이 페이지는 읽지마 읽지 말라고 접어놓은 거야 새들이 뾰족한 부리를 하늘에 박고 눈물을 떨어뜨리네 새를 불게 하라 때려서라도 불게 하라 명령이 타이핑이 되었다 그러나 내가 받아쓴 건 맥박보다 더 빠른 새새새새새새새새새새새새였는데 젖은 발가락이 내 얼굴을 더듬고 혀도 입술도 없는 내가 제발 살려주세요 이 엘리베이터는 올라가는 버튼이 없고 영안실은 물속에 있습니다만 부엌에서 너를 때렸을 때 새를 때리는 것 같았어 말하는 엄마 다 맞고 나서 너는 방으로 들어가 가만히 날개를 폈지 이것아 불쌍한 것아 (세상의 모든 신호등이 붉은색을 켜 든 고요한 밤 나는 엄마를 따라간다 나는 물속의 깊은 방문을 연다 거기 고요한 곳 엄마가 아가에게 젖을 물리고 일렁이는 ..

수레 / 최금진

그림 / 이종석 수레 / 최금진 그의 아버지 처럼 그도 나면서부터 하반신에 수레가 달려 있었다 당연히, 커서 그는 수레 끄는 사람이 되었다 그는 폐품을 찾아 개미굴 같은 골목을 헤매고 다녔다 바퀴에 척척 감기기만 할 뿐 결코 떨어지지 않는 길을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어주는 제 자신과 함께 다녔다 지겨워한 적도, 사랑한 적도 없었다 외발, 외발, 황새처럼 골라 디디며 바닥만 보고 걸었다 아랫도리에 돋아난 다 삭아빠진 수레를 굴리며 덜덜덜 몸을 떨면서 방바닥 식은 집에 돌아오곤 했다 의심의 여지도 없이 그의 뼈 몇개는 바큇살처럼 부러져 있었다 허리춤에 붙은 손잡이를 한번도 놓아본 적 없는 그에겐 언제나 고장나고 버려진 것들이 쌓여 있었다 아무도 대신 끌어주는 이가 없었다 그리고 어느날 그는 자신의 낡은 ..

수국 편지 / 이 효

그림 / 이 효 ​ ​ ​ ​ 수국 편지 / 이 효​ ​ ​ 마당 한편 아침을 베어 물고 아버지 유서처럼 정원에 한가득 핀 수국 ​ 직립의 슬픔과 마주한 자식들 엄니 업고 절벽의 빗소리 젖은 꽃잎 떨어지는 소리마다 짙어지는 어둠의 경계 ​ 혀바닥 마르고 주머니 속 무게 마른 나뭇잎 같아도 샘물 퍼주며 살아라 ​ 바람에 날리는 수국 편지 맑다 ​ ​ ​ ​ 이효 시집 / 당신의 숨 한 번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