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2023/04 30

살다가 보면 / 이근배​​

그림 / 최정길 ​ ​ ​ ​ ​ 살다가 보면 / 이근배​ ​ ​ 살다가 보면 넘어지지 않을 곳에서 넘어질 때가 있다 ​ 사랑을 말하지 않을 곳에서 사랑을 말할 때가 있다 ​ 눈물을 보이지 않을 곳에서 눈물을 보일 때가 있다 ​ 살다가 보면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기 위해서 떠나보낼 때가 있다 ​ 떠나보내지 않을 것을 떠나보내고 어둠 속에 갇혀 짐승스런 시간을 살 때가 있다 ​ ​ ​ ​ 월간 신문예 118호 수록 ​ ​ ​ ​​ ​

생각의 징검다리 / 나태주

그림 / 김현주 ​ ​ ​ 생각의 징검다리 / 나태주​ ​ ​ ​ 날마다 가장 보고 싶은 사람 너 ​ 자면서 꿈속에서까지 생각나는 사람은 너 ​ 너에게도 부디 내가 그런 사람이기를 ​ 너는 나에게 조그맣고 예쁜 생각의 징검돌 ​ 그 징검돌 딛고 하루하루 시간의 강물을 견딘다. ​ ​ ​ 나태주 시집 / 네가 웃으니 세상도 웃고 지구도 웃겠다 ​ ​ ​ ​

여자 냄새 / 김소월

그림 / 자심 여자 냄새 / 김소월 푸른 구름의 옷 입은 달의 냄새. 붉은 구름의 옷 입은 해의 냄새. 아니, 땀 냄새, 때 묻은 냄새. 비에 맞아 축업은 살과 옷 냄새. 푸른 바다..... 어지러운 배..... 보드라운 그리운 어떤 목숨의 조그마한 푸릇한 그무러진 영 어우러져 빗기는 살의 아우성..... 다시는 장사 지나간 숲속의 냄새. 유령 실은 널뛰는 뱃간의 냄새. 생고기의 바다의 냄새. 늦은 봄의 하늘을 떠도는 냄새. 모래 두던 바람은 그물안개를 불고 먼 거리의 불빛은 달 저녁을 울어라. 냄새만은 그 몸이 좋습니다. 냄새만은 그 몸이 좋습니다. 시집 / 김소월 시화집

목련 / 이대흠

그림 / 신종식 ​ ​ ​ ​ 목련 / 이대흠 ​ 사무쳐 잊히지 않는 이름이 있다면 목련이라 해야겠다 애써 지우려 하면 오히려 음각으로 새겨지는 그 이름을 연꽃으로 모시지 않으면 어떻게 견딜 수 있으랴 한때 내 그리움은 겨울 목련처럼 앙상하였으나 치통처럼 저리 다시 꽃 돋는 것이니 그 이름이 하 맑아 그대로 둘 수가 없으면 그 사람은 그냥 푸른 하늘로 놓아두고 맺히는 내 마음만 꽃받침이 되어야지 목련꽃 송이마다 마음을 달아두고 하늘빛 같은 그 사람을 꽃자리에 앉혀야지 그리움이 아니었다면 어찌 꽃이 폈겠냐고 그리 오래 허공으로 계시면 내가 어찌 꽃으로 울지 않겠냐고 흔들려도 봐야지 또 바람에 쓸쓸히 질 것이라고 이건 다만 사랑의 습관이라고 ​ ​ ​ ​ ​ 이대흠 시집 / 당신은 북천에서 온 사람 ​ ​ ..

홈커밍데이 / 이진우

그림 / 김제순 ​ ​ ​ ​ ​ 홈커밍데이 / 이진우 ​ ​​ ​ 이름을 부른 것도 아닌데 여름이 온다 ​ 어른이 되기도 전에 벌써 우리가 상상도 못했던 감각들이 유빙처럼 떠내려갔지 애인을 기다리며 마시는 커피의 얼음이 녹는 속도라든지 그 사람과 이별한 후 마시게 될 맥주의 온도라든지 우리는 우리의 이마와 코끝이 얼마나 가까운지도 알지 못했지 앨범에 넣어둔 사진이 눅눅해지는 건지도 몰랐지 그때 네가 입고 있던 반팔 티는 무슨 색이었나 벽지에 말라붙은 모기의 핏자국을 보면서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 장마처럼 햇볕이 쏟아진다 운동장엔 새로 자란 그림자들이 무성하다 다음 여름도 그랬으면 좋겠다 여름이 오는데 여름에 죽은 친구의 얼굴이 기억나질 않는다 ​ ​ (2023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 ​ ..

뿌리에게 / 나희덕

그림 / 길현수 뿌리에게 / 나희덕 깊은 곳에서 네가 나의 뿌리였을 때 나는 막 갈구어진 연한 흙이어서 너를 잘 기억할 수 있다 네 숨결 대이던 그 자리에 더운 김이 오르고 박은 피 뽑아 네게 흘려보내며 즐거움에 떨던 아 나의 사랑을 먼우물 앞에서도 목마르던 나의 뿌리여 나를 뚫고 오르렴, 눈부셔 잘 부서지는 살이니 내 밝은 피에 즐겁게 발 적시며 뻗어가려무나 척추를 휘어접고 더 넓게 뻗으면 그 때마다 나는 착한 그릇이 되어 너를 감싸고, 불꽃같은 바람이 가슴을 두드려 세워도 네 뻗어가는 끝을 하냥 축복하는 나는 어리석고 은밀한 기쁨을 가졌어라 네가 타고 내려올수록 단단해지는 나의 살을 보아라 이제 거무스레 늙었으니 슬픔만 한 두릅 꿰어 있는 껍데기의 마지막 잔을 마셔다오 깊은 곳에서 네가 나의 뿌리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