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문학이야기/명시

뿌리에게 / 나희덕

푸른 언덕 2023. 4. 21. 18:53

 

그림 / 길현수

 

 

 

 

 

뿌리에게 / 나희덕

 

 

깊은 곳에서 네가 나의 뿌리였을 때

나는 막 갈구어진 연한 흙이어서

너를 잘 기억할 수 있다

네 숨결 대이던 그 자리에 더운 김이 오르고

박은 피 뽑아 네게 흘려보내며 즐거움에 떨던

아 나의 사랑을

 

먼우물 앞에서도 목마르던 나의 뿌리여

나를 뚫고 오르렴,

눈부셔 잘 부서지는 살이니

내 밝은 피에 즐겁게 발 적시며 뻗어가려무나

 

척추를 휘어접고 더 넓게 뻗으면

그 때마다 나는 착한 그릇이 되어 너를 감싸고,

불꽃같은 바람이 가슴을 두드려 세워도

네 뻗어가는 끝을 하냥 축복하는 나는

어리석고 은밀한 기쁨을 가졌어라

 

네가 타고 내려올수록

단단해지는 나의 살을 보아라

이제 거무스레 늙었으니

슬픔만 한 두릅 꿰어 있는 껍데기의

마지막 잔을 마셔다오

 

깊은 곳에서 네가 나의 뿌리였을 때

내 가슴에 끓어오르던 벌레들,

그러나 지금은 하나의 빈 그릇,

너의 푸른 줄기 솟아 햇살에 반짝이면

나는 어느 산비탈 연한 흙으로 일구어져 있을 테니

 

 

 

 

 

나희덕 시집 / 뿌리에게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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