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 성기혁
찬밥 / 문정희
아픈 몸 일으켜 혼자 찬밥을 먹는다
찬밥 속에는 서릿발이 목을 쑤신다
부엌에는 각종 전기 제품이 있어
일 분만 단추를 눌러도 따끈한 밥이 되는 세상
찬밥을 먹기도 쉽지 않지만
오늘 혼자 찬밥을 먹는다
가족에겐 따스한 밥 지어 먹이고
찬밥을 먹는 사람
이 빠진 그릇에 찬밥 훑어
누가 남긴 무 조각에 생선 가시를 핥고
몸에서는 제일 따스한 사랑을 뿜던 그녀
깊은 밤에도
혼자 달그락거리던 그 손이 그리워
나 오늘 아픈 몸 일으켜 찬밥을 먹는다
집집마다 신을 보낼 수 없어
신 대신 보냈다는 설도 있지만
홀로 먹는 찬밥 속에서 그녀를 만난다
나 오늘
세상의 찬밥이 되어
문정희 시집 / 양귀비꽃 머리에 꽂고 <민음사, 2004>
'문학이야기 > 명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뿌리에게 / 나희덕 (23) | 2023.04.21 |
|---|---|
| 레드 와인 / 고미경 (34) | 2023.04.20 |
| 칸트의 우산 / 고미경 (28) | 2023.04.18 |
| 바람이 그리움을 안다면 / 강원석 (21) | 2023.04.15 |
|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 알렉산드르 세르게예비치 푸시킨 (21) | 2023.04.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