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2023/05 28

오 남매 / 박은영

그림 / 김진구 ​ ​ ​ ​ 오 남매 / 박은영​ ​ ​ 파지 줍던 할머니가 죽었다 ​ 자식 놈들 키워 놔 봤자 암 소용없는겨, 빌어먹든 어쩌든 염병 내 알 바 아녀. ​ 연락 끊긴 자식들을 파지 사이 끼우고 고된 길을 끌던 할머니, 구겨진 걸음에 염을 한다 빈 리어카에서 내린 바람이 창고 문을 여는 밤, 쏟아지는 파지들, 염장이가 진물 고인 발바닥을 닦아 낸다 ​ 거기, ​ 옹송그려 박여있는 ​ 티눈 다섯 개 ​ ​ ​ ​ 박은영 시집 / 구름은 울 준비가 되어 있다 ​ ​ ​ ​ ​ ​ ​ ​ ​

마늘 촛불 / 복효근

. 마늘 촛불 / 복효근 삼겹살 함께 싸 먹으라고 얇게 저며 내 놓은 마늘쪽 초록색 심지 같은 것이 뾰족하니 박혀 있다 그러니까 이것이 마늘어미의 태 안에 앉아 있는 마늘아기와 같은 것인데 알을 잔뜩 품은 굴비를 구워 먹을 때처럼 속이 짜안하니 코끝을 울린다 무심코 된장에 찍어 씹어 삼키는데 들이킨 소주 때문인지 그 초록색 심지에 불이 붙었는지 그 무슨 비애 같은 것이 뉘우침 같은 것이 촛불처럼 내 안의 어둠을 살짝 걷어내면서 헛헛한 속을 밝히는 것 같아서 나도 누구에겐가 싹이 막 돋기 시작한 마늘처럼 조금은 매콤하게 조금은 아릿하면서 그리고 조금은 환하게 불 밝히는 사랑이고 싶은 것이다 *복효근 시인 (1962~) *시와시학 등단 (1991) 단양 마늘 시장

백지 1 / 조정권

그림 / 정란숙 ​ ​ ​ ​ 백지 1 / 조정권 ​ ​ ​ 꽃씨를 떨구듯 적요한 시간의 마당에 백지 한 장이 떨어져 있다. 흔히 돌보지 않는 종이지만 비어있는 그것은 신이 놓고 간 물음. 시인은 그것을 10월의 포켓에 하루 종일 넣고 다니다가 밤의 한 기슭에 등불을 밝히고 읽는다. 흔히 돌보지 않는 종이지만 비어 있는 그것은 신의 뜻. 공손하게 달라하면 조용히 대답을 내려주신다. ​ ​ ​ ​ 저서 / 이형기 시인의 시 쓰기 강의 ​ ​ ​ ​​

가지 않은 길 / 로버트 프로스트

그림 / 이종석 ​ ​ ​ ​ 가지 않은 길 / 로버트 프로스트​ ​ ​ ​ 노란 숲속에 두 갈래 길 나 있어, 나는 둘 다 가지 못하고 하나의 길만 걷는 것 아쉬워 수풀 속으로 굽어 사라지는 길 하나 멀리멀리 한참 서서 바라보았지. ​ 그리고선 똑같이 아름답지만 풀이 우거지고 인적이 없어 아마도 더 끌렸던 다른 길 택했지. 물론 인적으로 치자면, 지나간 발길들로 두 길은 정말 거의 같게 다져져 있었고, ​ 사람들이 시커멓게 밟지 않은 나뭇잎들이 그날 아침 두 길 모두를 한결같이 덮고 있긴 했지만. 아, 나는 한 길을 또다른 날을 위해 남겨두었네! 하지만 길은 길로 이어지는 걸 알기에 내가 다시 오리라 믿지는 않았지. ​ 지금부터 오래오래 후 어디에선가 나는 한숨지으며 이렇게 말하겠지. 숲속에 두 갈래 ..

오월 / 피천득

그림 / 김진구 오월 / 피천득 신록을 바라다 보면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즐겁다 내 나이를 세어 무엇하리 나는 지금 오월 속에 있다 연한 녹색은 나날이 번져 가고 있다 어느덧 짙어지고 말 것이다 머문 듯 가는 것이 세월인 것을 유월이 되면 "원숙한 여인"같이 녹음이 우거지리라 그리고 태양은 정열을 퍼붓기 시작할 것이다 밝고 맑은 순결한 오월은 지금 가고 있다 -피천득-

오솔길 / 나태주

그림 / 박인호 오솔길 / 나태주 멀리 있는 사람을 두고 말을 한다 보고 싶다고! 그리웠다고! 바람에게 말을 하고 나무에게 말을 한다 바람더러 전해달라고 그 사람이 이 숲속 길 혼자 지날 때 살그머니 귓속말로 들려달라고 여기 없는 사람을 두고 말을 한다 우리 곧 만나자고! 웃으면서 만나자고! 나태주 시집 / 너무 잘하려고 애쓰지 마라

유월의 독서 / 박준

그림 / 이기전 ​ ​ ​ ​ ​ 유월의 독서 / 박준​ ​ ​ 그림자가 먼저 달려드는 산자락 아래 집에는 ​ 대낮에도 불을 끄지 못하는 여자가 살고 ​ 여자의 눈 밑에 난 작고 새카만 점에서 나는 한 일 년을 살았다 ​ 여럿이 같이 앉아 울 수도 있을 너른 마당이 있던 집 ​ 나는 그 곳에서 유월이 오도록 꽃잎 같은 책장만 넘겼다 ​ 침략과 주름과 유목과 노을의 페이지마다 침을 묻혔다 ​ 저녁이 되면 그 집의 불빛은 여자의 눈 밑 점처럼 돋아나고 ​ 새로 자란 명아주 잎들 위로 웃비가 내리다 가기도 했다 ​ 먼 능선 위를 나는 새들도 제 눈 속 가득 찬 물기들을 그 빛을 보며 말려가겠다 ​ 책장을 덮어도 눈이 자꾸 부시던 유월이었다 ​ ​ ​ ​ 박준 시집 /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 며칠은 먹었다 ​ ​..

그토록 / 강해림

그림 / 신종섭 그토록 / 강해림 임종을 앞두고 끝내 말문을 닫은 엄마의 눈빛은 깊고 완강했는데, 아무도 들일 수 없는 빈 헛간처럼 세상에 온 적도 없고, 오지 않을 슬픔도 슬픔이어서 오랜 세월 지하 생활자였던 매미는 죽기전에 짝짓기를 하려고 그토록 그악스럽게 울어대더니 어떤 신은 형상이 누런 자루 같다 붉기가 빨간 불꽃 같고, 얼굴이 없다 다시, 산해경을 읽는 밤이면 신의 영역, 인간의 영역이 따로 없다 당신도 나도 반인반수다 그러니까, 그날 방 안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고독사라고 말하지 마라 고독이란 결코 공개될 수 없는 것 비좁아 터진 닭장 속에 갇혀서도 닭들은 먹고 자고 배설하고 알을 낳고 서로 피 터지게 싸우기도 했는데 엉덩이 종기에 입을 대고 빨아도 지 새끼 건 더러운 줄 몰랐지 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