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2023/05 28

벽이 온다 / 박설희

그림 / 김화숙 ​ ​ ​ ​ ​ 벽이 온다 / 박설희​ ​ ​ 밧줄에 의지해 암벽 하나를 간신히 넘어왔는데 또 밧줄이 드리워져 있다 ​ 얼마나 가야 하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벽이 온다 한 손 한 손 되짚어 내려간다 내려갈 힘은 아직도 남아 있다고 생각되었을 때 ​ 절벽에 서 있는 소나무, 꺾는 각도가 절묘하다 공중을 더듬으며 길 찾는 목숨들 낭떠러지를 품고 산다 끝이라는 것은 새로운 방식으로 밀어붙여야 한다는 것 씨앗을 잉태하는 것도 그 이유 ​ 절벽에 나무들이 자라고 있다 나무마다 절벽이 있다 빛의 화살은 길고 짧아서 목마르게 휘어지는 행로 ​ 파르르 떨던 나뭇가지 하나가 방금, 방향을 조금 틀었다 ​ ​ ​ ​ ​ 박설희 시집 / 가슴을 재다 ​ ​ ​ ​ ​

청산도의 봄 / 이 효

그림 / 이 효 ​ ​ ​ ​ 청산도의 봄 / 이 효 ​ 굽은 허리 밭두렁 흙 묻은 치맛자락 푸른 남해에 담가 하늘에 펼쳐 더니 유채꽃 한가득 나비가 난다 청보리 휘날리고 무너진 돌담길 아래로 노란 안부가 물든다 할미 텃밭 사라진 자리 꽃밭이 자꾸 늘어난다 양산 쓴 서울 양반들 할미 돌무덤에 올라가 찰칵 청산도 노란 물결에 흔들린다 멀리서 들리는 뱃고동 소리 밭을 갈 사람 어디 없소 점점 멀어지는 할미 목소리 청산도의 봄은 노랗게 미쳐간다 ​ 출처 / 한국 시학 2023 봄 (65호) ​ ​ ​ ​

들 향기 피는 길 / 서현숙

그림 / 곽명산 ​ ​ ​ 들 향기 피는 길 / 서현숙​ ​ ​ ​ 추운 겨울 이겨 낸 유채꽃 노랗게 물들면 쑥부쟁이 민들레 들 향기 피는 길 ​ 양지바른 언덕 위 작은 들꽃 향기로운 바람 불면 일렁이는 수줍은 미소 ​ 연초록 고운 물결 오월의 잎새 내 마음도 살랑살랑 푸른 옷 갈아입고 ​ 사랑과 기쁨의 꽃 피우면 초록 내음 넘치는 들 향기 피는 길 ​ ​ ​ 서현숙 시집 / 오월은 간다 ​ ​ ​​ ​

바람, 오월 / 김명희

그림 / 노의웅 ​ ​ ​ ​ 바람, 오월 / 김명희​ ​ ​ 또 다시 시야가 좁아지기 시작한다 어떤 물방울이든 나뭇가지나 새벽의 어둠을 통과하지 못하면 제 속도를 얻지 못한다 바람소리들은 어디서나 금속으로 변했다 나뭇잎들 변성기의 음성처럼 들썩들썩 짙어졌고 책장을 덮으면 그늘이 시작되는 곳으로 낡은 관절들의 이동은 오후 내내 바빠졌다 눈 먼 서랍들마다 외출을 서두르는 넋두리로 가득했고 마음으로부터 한 뼘만 부주의해도 푸른 물이 들었다 쓰레기들의 낮은 지대에서 누군가 휘파람을 분다 곧, 저녁이 될 것이고 노인들 몇은 몸 속 더 깊은 곳의 뼈 속까지 바람을 저장하곤 반신의 기울기로 돌아왔다 5월이 왔다, 바람들은 쉽사리 물들었고 또 다시 5월이 왔다 개구리 소년들은 80대의 브라운관 속으로 영영 사라졌는지..

강의 백일몽 (헤닐 강) /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사진 / 정관용 ​ ​ ​ 강의 백일몽 (헤닐 강) /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 ​ 포플러 나무들은 시들지만 그 영상들은 남긴다. ​ (얼마나 아름다운 시간인가!) ​ 포플러 나무들은 시들지만 우리한테 바람을 남겨 놓는다. ​ 태양 아래 모든 것에 바람은 수의를 입힌다. ​ (얼마나 슬프고 짧은 시간인가!) ​ 허나 그건 우리한테 그 메아리를 남긴다, 강 위에 떠도는 그걸. ​ 반딧불들의 세계가 내 생각에 엄습했다. ​ (얼마나 아름다운 시간인가!) ​ 그리고 축소 심장이 내 손가락들에 꽃핀다. ​ ​ ​ ​ 시집 / 세계의 명시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