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문학이야기/명시

유월의 독서 / 박준

푸른 언덕 2023. 5. 22. 18:55

그림 / 이기전

유월의 독서 / 박준

그림자가

먼저 달려드는

산자락 아래 집에는

대낮에도

불을 끄지 못하는

여자가 살고

여자의 눈 밑에 난

작고 새카만 점에서

나는 한 일 년을 살았다

여럿이 같이 앉아

울 수도 있을

너른 마당이 있던 집

나는 그 곳에서

유월이 오도록

꽃잎 같은 책장만 넘겼다

침략과 주름과 유목과 노을의

페이지마다 침을 묻혔다

저녁이 되면

그 집의 불빛은

여자의 눈 밑 점처럼 돋아나고

새로 자란 명아주 잎들 위로

웃비가 내리다 가기도 했다

먼 능선 위를 나는 새들도

제 눈 속 가득 찬 물기들을

그 빛을 보며 말려가겠다

책장을 덮어도

눈이 자꾸 부시던

유월이었다

박준 시집 /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 며칠은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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