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2023/04 30

답장 / 조광자

그림 / 박정실 ​ ​ ​ ​ 답장 / 조광자​ ​ ​ ​ 내 곁에 머무는 난(蘭)의 가슴에 사랑의 연서를 보냈는데 ​ 추운 겨울에 가느다란 대궁을 밀어 올리더니 하얀 별꽃을 매달아 놓았다 ​ 사랑이 별을 달고 왔다 지상으로 내려온 별들이 어두운 방 안을 환하게 피웠다 ​ 추신으로, 향기까지 덧붙였다 ​ ​ ​ ​ 조광자 시집 / 닿을 수 없는 슬픔에게 ​ ​ ​ ​​

섬진강 2 / 김용택

그림/ 김미자 섬진강 2 / 김용택 저렇게도 불빛이 살아나는구나. 생솔 연기 눈물 글썽이며 검은 치마폭 같은 산자락에 몇 가옥 집들은 어둠속으로 사라지고 불빛은 살아나며 산은 눈뜨는구나. 어둘수록 눈 비벼 부릅뜬 눈빛만 남아 섬진강물 위에 불송이로 뜨는구나. 밤마다 산은 어둠을 베어내리고 누이는 매운 눈 비벼 불빛 살려내며 치마폭에 쌓이는 눈물은 강물에 가져다 버린다. 누이야 시린 물소리는 더욱 시리게 아침이 올 때까지 너의 허리에 두껍게 감기는구나. 이른 아침 어느새 너는 물동이로 얼음을 깨고 물을 퍼 오는구나. 아무도 모르게 하나 남은 불송이를 물동이에 띄우고 하얀 서릿발을 밟으며 너는 강물을 길어오는구나. 참으로 그날이 와 우리 다 모여 굴뚝마다 연기나고 첫날밤 불을 끌 때까지는, 스스로 허리띠를 ..

밥값 / 문태준

​ ​ ​ ​ 밥값 / 문태준 ​ ​ 허름한 식당에서 국밥을 한술 막 뜨고 있을 때 그이가 들어섰다 나는 그이를 단번에 알아보았다 수레에 빈 병과 폐지 등속을 싣고 절룩거리며 오는 그이를 늦은 밤 좁은 골목에서 마주친 적이 있었다 그이는 식당 한편 벽에 걸린 달력의 28일을 오른손으로 연거푸 짚어 보였다 무슨 말인가를 크게 했으나 나는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식당의 여주인은 조금도 언짢아하는 기색이 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짧은 시간 후의 그이의 앞에 따뜻한 밥상이 왔다 ​ ​ ​ 문태준 시집 ​ ​ ​ ​ ​ ​

봄소식 / 문태준

​ ​ ​ ​ ​ 봄소식 / 문태준​ ​ ​ ​ 푸릇푸릇 처음 돋은 수선화 싹을 닭이 부리로 콕콕 쪼고 쑤석쑤석하네 ​ 어머니가 작대기로 무른 땅을 두드리며 닭을 수선화의 바깥으로 쫓아내네 ​ 닭은 놀라 사납게 푸덕푸덕 날개를 치네 ​ 닭의 바깥에는 뾰조록이 더 올라오는 어린 봄 ​ ​ ​ ​ 문태준 시집 / 아침은 생각한다 ​ ​ ​ ​ ​ ​

봄비 / 문태준

그림 / 유진선 ​ ​ ​ ​ 봄비 / 문태준​ ​ ​ ​ 봄비 온다 공손한 말씨의 봄비 온다 ​ 먼 산등성이에 상수리나무 잎새에 ​ 송홧가루 날려 내리듯 봄비 온다 ​ 네 마음에 맴도는 봄비 온다 ​ 머윗잎에 마늘밭에 일하고 오는 소의 곧은 등 위에 ​ 봄비 온다 어진 마음의 봄비 온다 ​ ​ ​ ​ 문태준 시집 / 아침은 생각한다 ​ ​ ​ * 붙임성 댓글은 사양합니다 답방을 하지 않겠습니다. ​ ​ ​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 류시화

그림 / 박형배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 류시화 물속에는 물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는 그 하늘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내 안에는 나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내 안에 있는 이여 내 안에서 나를 흔드는 이여 물처럼 하늘처럼 내 깊은 곳 흘러서 은밀한 내 꿈과 만나는 이여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류시화 시집 /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 붙임성 댓글은 사양합니다 답방을 하지 않겠습니다.

방랑의 엘레지 / 쉼보르스카

그림 / 이은실 방랑의 엘레지 / 쉼보르스카 모든 것이 내 것이지만, 내 소유는 아니다. 바라보고 있는 동안은 내 것이지만, 기억으로 소유할 순 없다. 가까스로 기억을 떠올린들 불확실할 뿐. 머리를 잘못 맞춘 여신의 조각상처럼. 사모코프에 내리는 비는 멈출 줄 모른다. 파리의 정경은 루브르에서 내 손가락이 가리키는 지점까지 가물가물 희미하게 사라져간다. 생마르탱의 가로수 길, 그곳의 계단은 갈수록 페이드아웃. 내 기억 속에서 '다리의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는 고작 다리 한 개와 반쯤 남은 또 다른 다리의 영상. 가여운 웁살라에는 무너진 대성당의 잔해. 소피아에는 얼굴없이 몸통만 남은 가여운 무희가 있다 눈동자 없는 그의 얼굴 따로, 동공 없는 그의 눈동자 따로, 고양이의 동공도 따로. 새롭게 재건된 협곡..

끝과 시작 / 쉼보르스카스

그림/ 서길순 끝과 시작 / 쉼보르스카스 모든 전쟁이 끝날 때마다 누군가는 청소를 해야만 하리. 그럭저럭 정돈된 꼴을 갖추려면 뭐든 저절로 되는 법은 없으니. 시체로 가득 찬 수레가 지나갈 수 있도록 누군가는 길가의 잔해들을 한옆으로 밀어내야 하리. 누군가는 허우적대며 걸어가야 하리. 소파의 스프링과 깨진 유리 조각, 피 묻은 넝마 조각이 가득한 진흙과 잿더미를 헤치고. 누군가는 벽을 지탱할 대들보를 운반하고, 창에 유리를 끼우고, 경첩에 문을 달아야 하리. 사진에 근사하게 나오려면 많은 세월이 요구되는 법. 모든 카메라는 이미 또 다른 전쟁터로 떠나버렸건만. 다리도 다시 놓고, 역도 새로 지어야 하리. 비록 닳아서 누더기가 될지언정 소매를 걷어붙이고. 빗자루를 손에 든 누군가가 과거를 회상하면, 가만히..

카테고리 없음 2023.04.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