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문학이야기/명시

방랑의 엘레지 / 쉼보르스카

푸른 언덕 2023. 4. 2. 20:18

 

그림 / 이은실

 

 

 

 

방랑의 엘레지 / 쉼보르스카

 

 

모든 것이 내 것이지만, 내 소유는 아니다.

바라보고 있는 동안은 내 것이지만,

기억으로 소유할 순 없다.

 

가까스로 기억을 떠올린들 불확실할 뿐.

머리를 잘못 맞춘 여신의 조각상처럼.

 

사모코프에 내리는 비는

멈출 줄 모른다.

 

파리의 정경은

루브르에서 내 손가락이 가리키는 지점까지

가물가물 희미하게 사라져간다.

 

생마르탱의 가로수 길,

그곳의 계단은 갈수록 페이드아웃.

 

내 기억 속에서 '다리의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는

고작 다리 한 개와 반쯤 남은 또 다른 다리의 영상.

 

가여운 웁살라에는

무너진 대성당의 잔해.

 

소피아에는 얼굴없이 몸통만 남은

가여운 무희가 있다

 

눈동자 없는 그의 얼굴 따로,

동공 없는 그의 눈동자 따로,

고양이의 동공도 따로.

 

새롭게 재건된 협곡 위에서

캅카스의 독수리가 날고 있다.

태양의 황금빛은 전혀 사실적이지 않고,

바위는 엉터리 모조품에 불과하다.

 

모든 것이 내 것이지만, 내 소유는 아니다.

바라보고 있는 동안은 내 것이지만,

기억으로 소유할 순 없다.

 

헤아릴 수도, 저장할 수도 없는 풍경들

미세한 섬유질이나 모래알,

물방울의 개별적인 세밀함은 더한 법.

 

나는 나뭇잎의 뚜렷한 윤곽 하나

뇌리에 새기지 못한다.

 

한 번의 눈짓에 담긴

작별을 내포한 환영의 인사

 

넘치기도 하고, 모자라기도 한

한 번의 고갯짓.

 

 

 

 

비스와바 보르스카 시선집 / 끝과 시작

*1996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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