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문학이야기/명시

나의 마을이 설원이 되는 동안 / 이예진

푸른 언덕 2023. 3. 30. 16:42

 

그림 / 이소윤

 

 

 

 

<2023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

 

나의 마을이 설원이 되는 동안 / 이예진

 

 

 

금값이 올랐다

 

언니는 손금을 팔러갔다

 

엄마랑 아빠는 이제부터 따로 살 거란다

 

내가 어릴 때, 동화를 쓴 적이 있다 내가 언니의 숙제를 찢으면서 시작되는 이야기다

언니도 화가 나서 엄마의 가계부를 찢었고 엄마는 아빠의 신문을 찢고 아빠는 달력을 찢다가,

온 세상에 찢어진 종이가 눈처럼 펄펄 내리며 끝난다

 

손금이 사라진 사람들이 어디로 갔는지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다

집에 남고 싶은 것은 정말로 나 하나뿐일까? 언니의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더는 찢을 것이 없었다 눈이 쌓이고 금값이 오르고 검은 외투를 꽁꽁 여민 사람들이 거리를 쏘아 다녔다

엄마는 결국 한 돈짜리 목걸이를 한 애인을 따라갔지 아빠는 한 달에 한 번 서울에 오겠다고 했다

 

따로 따로 떨어지는 눈과

 

따로 노는 낡고 지친 눈빛을

 

집이 사라지고 방향이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