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먼 당신(자작 시) 눈먼 당신 / 이 효 유월이 오기 전에 나는 떠나야 하는데 겹겹이 쌓아 올린 꽃봉오리 지나가는 행인들 내 향기에 취할까 봐 담장 위로 달아납니다. 도시 사람들이 무심히 눌러대는 셔터 소리에 수많은 가시들 뽑아 마음 밭에 울타리를 두릅니다. 유월이 오기 전에 나는 떠나야 하는데 계절마다 당신을 위해 겹겹이 쌓아 올린 붉은 연정 태양 앞에 활짝 펼쳐 놓아도 보지 못하는, 눈먼 당신 안에서부터 터져버린 붉은 울음 하늘을 장밋빛으로 물들입니다. 문학이야기/자작시 2020.05.19
하늘에 도장 찍기 (자작 시) 하늘에 도장 찍기 / 이 효 선홍빛 구두 신고 날 유혹하러 왔나요 그대 가슴에 머물 수 없어요 검정 운동화 신고 난 자식들 먹여 살려야 해요 오월에 여왕이 왔는데 내 선홍빛 입술은 흙장미가 되어 버렸어요. 짙은 입술로 하늘에 도장 찍어요 내년에는 꼭 눈 맞춤해요. 잘 가요. 문학이야기/자작시 2020.05.17
가시 (자작시) 가시 / 이 효 어두운 세상 머리 들고 붉은 벽돌 틈새로 오른 풀 이 봄날 누군가의 손아귀에 잡혀 머리채 뽑혀도 또 올라오는 풀 사랑의 날개 부러진 날 세상 짐 지고 바다로 간다 파도에 몸을 맡긴 순간 누군가 머리채 잡아 올린다 붉은 벽돌이고 오른 풀 숱한 슬픔 하늘 적신다 바윗처럼 .. 문학이야기/자작시 2020.05.16
맨발의 봄 (자작 시) 맨발의 봄 / 이 효 식탁 위에 자식들이 하나 둘 놓고 간 꽃바구니 가득하건만 늙으신 어머니 창가에 앉아 어젯밤에 내린 비를 원망한다. 해마다 오월이 오면 붉은 작약이 진자리 옆으로 돌아가신 아버지 손길 닿은 수국이 연이어 활짝 피는데 어젯밤 내린 비에 하얀 꽃잎 바닥에 수북하다... 문학이야기/자작시 2020.05.12
감악산 운무 감악산의 운무 / 이 효 쏟아내고 싶다 나무가 비의 마음을 알고 소리 없이 밤새도록 비를 받아주듯이 쏟아내고 싶은 마음 내 마음을 누가 알까 그 마음 붉게 우는지 시퍼렇게 우는지 감악산은 내 마음을 알까 굳은 바위 같은 마음을 출렁거리는 세상을 건너 감악산에 오른다 운무처럼 잡.. 문학이야기/자작시 2020.05.10
고마운 햇살(자작시) 고마운 햇살 / 이 효 오랜만에 찾아간 아버지 산소 서리가 곱게 뿌려졌습니다 차가운 서릿발 속에서도 질기게 올라오는 잡초들 너는 살겠다고 올라오고 나는 죽이려고 목을 비틀고 인생이 다 그렇지 수술대 위에서 생명 끈 놓으시고 이젠 그만 살련다 오늘은 늙은 딸이 찾아왔습니다. 멀.. 문학이야기/자작시 2020.05.08
익어간다는 것 (자작 시) 익어간다는 것 / 이 효 연둣빛 치마저고리 입고 노란 꽃잎 머리에 달고 종이 가마 타고 시집온 너 한 여자가 익어 간다는 것은 눈금 잃은 저울 노랗게 물든다는 것은 긴 시간 속을 홀로 걷는 일 익어 간다는 것은 고단한 살림 견디어 내는 일 익어간다는 것은 자신을 녹여 다른 사람들과 하.. 문학이야기/자작시 2020.04.30
담쟁이 넝쿨 담쟁이넝쿨 / 이 효 디디고 올라가면 먼저 오른 넝쿨들 발로 밀지 말아라 자동차 그 담벼락 밑 아찔하게 달리고 청춘 한 잎 떨어진다 푸르른 청춘들이여 피 흘림 절망 딛고 한 잎씩 천천히 올라라 틈을 내어 주며 함께 벽을 넘어라 튀어 오른 아침 벌과 나비 친구되어 깊은 상처 서로 향기 .. 문학이야기/자작시 2020.04.26
공간(자작 시) 공간 / 이 효 테이블 위에 라테 한 잔 겉옷을 걸쳐 놓은 의자 서로의 안부를 묻는 눈빛들 생각을 지지해 주는 순간들 그때는 몰랐다 구석진 공간에서 나누는 대화 흔들리는 시계 추에 매달린 불안한 시간들인 줄만 사람들 입에 채워진 흰 수갑 작은 조각보 같은 시간들 행복을 꿰매는 바늘.. 문학이야기/자작시 2020.04.23
정지된 화면 정지된 화면 / 이 효 아파트 앞 양지바른 곳 두 마리 고양이가 햇살을 받고 있다. 어린 새끼 고양이 어미 등에 매달려 세상을 바라본다. 호기심 많은 낯선 여자 카메라 들고 가까이 다가간다. 새끼 고양이 등에 털이 선다. 헤치지 않을게 ~ 여자의 눈빛 봄 햇살 보낸다. 날카로운 어미의 눈.. 문학이야기/자작시 2020.04.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