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2022/06 30

꿈과 충돌하다 / 조하은

그림 / 최 미 정 꿈과 충돌하다 / 조하은 밤인지 새벽인지 모호한 시간 벗은 몸을 파스텔 톤으로 비춰주는 욕실 거울 속에서 아련함과 사실 사이의 경계를 바라본다 기억할 만한 봄날은 어디에도 없다 얼토당토 않은 박자가 쉰 살의 시간을 두둘겨댈 때 몸을 동그랗게 말고 있는 고독이 타일 위로 뚝뚝 떨어졌다 심장과 뇌의 온도가 달라 가려운 뿔들이 불쑥불쑥 자라났다 날마다 기울어지는 사이렌의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잠으로 가는 길을 몰라 날마다 잠과 충돌했다 바람이 몸 안을 들쑤시고 있었다 조하은 시집 / 얼마간은 불량하게

서대문 공원 / 정호승

그림 / 유민 서대문 공원 / 정호승 서대문 공원에 가면 사람을 자식으로 둔 나무가 있다 폐허인 양 외따로 떨어져 있는 사형 집행장 정문 앞 유난히 바람에 흔들리는 미루나무 미루나무는 말했다 사형 집행이 있는 날이면 애써 눈물은 감추고 말했다 그래 그래 네가 바로 내 아들이다 그래 그래 네가 바로 내 딸이다 그렇게 말하고 울지 말고 잘 가라고 몇날 며칠 바람에 몸을 맡겼다 정호승 시선집 / 내가 사랑하는 사람

혼자서 / 김소연

그림 / 황수빈 혼자서 / 김소연 상가의 컴컴한 내부가 최대한 컴컴해진다 칼을 대어 틈새를 도려낸 듯 빛이 새어 나와도 간절함은 저렇게 표현돼야 한다 최대한 입을 꽉 다문 채 빰에 접착된 핸드폰을 꼭 감싸고 최대한 고개를 숙인 저 사람처럼 귀는 아가미가 되었다 물고기가 되었다 흘러 다녔다 현수막은 최대한 환해진다 달은 관람자처럼 최대한 가까이 다가온다 저 마네킹은 눈동자가 있다 저 조각상은 눈동자가 없다 최대한 인간을 닮기 위해서 밤은 가장 춥다 분노는 이런 식으로 표현해야 한다 최대한 급진적으로 집은 구겨진다 쓰레기차가 쓰레기봉투를 쓸어 담듯 마지막 아버지를 최대한 쓸어 담고서 컴컴한 내일이 박스처럼 쌓여 있다 오늘이 내일을 벼랑으로 데려간다 창문을 열면 바람이 들어온다 휙, 내 냄새가 난다 김소연 시..

제대병 / 이성복

그림 / 유민혜 제대병 / 이성복 아직도 나는 지나가는 해군 찝차를 보면 경례! 붙이고 싶어진다 그런 날에는 페루를 향해 죽으러 가는 새들의 날개의 아픔을 나는 느낀다 그렇다, 무덤 위에 할미꽃 피듯이 내 기억속에 송이버섯 돋는 날이 있다 그런 날이면 내 아는 사람이 죽었다는 소식이 오기도 한다 순지가 죽었대, 순지가! 그러면 나도 나직이 중얼거린다 순, 지, 가, 죽, 었, 다 이성복 시집 /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함박이라는 섬 / 김미선

그림 / 정유경 함박이라는 섬 / 김미선 내 어린 그때 우주만큼 큰 몸집이었지 이제는 갈수록 작아져서 손바닥으로 가려도 되는 먼지가 되어 날아가 버릴 것 같은 섬 아닌 섬 푸르고 넓은 바다는 사라지고 내 가슴속에 가시로 남아 지나간 세월을 찔러대는 잃어버린 첫사랑의 이름 함박도 김미선 시집 / 바위의 꿈 섬 시인 *1960년 경남 통영 출생 *2005 등단 *시집 *산문집

달은 추억의 반죽 덩어리 / 송찬호

그림 / 이경희 달은 추억의 반죽 덩어리 / 송찬호 누가 저기다 밥을 쏟아 놓았을까 모락모락 밥집 위로 뜨는 희망처럼 늦은 저녁 밥상에 한 그릇씩 달을 띄우고 둘러앉을 때 달을 깨뜨리고 달 속에서 떠오르는 노오란 달 달만 바라만 보아도 부풀어 오르는 추억의 반죽 덩어리 우리가 이 지상까지 흘러오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빛을 잃은 것이냐 먹고 버린 달 껍질이 조각조각 모여 모여 달의 원형으로 회복되기까지 어기여차, 밤은 굴러가는 달빛처럼 빛나는 단단한 근육 덩어리 달은 꽁꽁 뭉친 주먹밥이다. 밥집 위에 뜬 희망처럼, 꺼지지 않는 시집 / 어느 가슴엔들 시가 꽃피지 않으랴 애송시 100편

현상 수배 / 이수명

그림 / 조원자 현상 수배 / 이수명 그는 현상 수배범이다.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넓은 거리의 게시판에 걸려 있다. 사진 속에서 그는 웃고 있다. 전단지가 햇빛에 누렇게 바래고, 빗물에 얼룩이 져도, 이 손이 뜯고 저 손이 찢어도 웃고 있다. 그는 산산조각나고 있다. 어느 날 한 쪽 눈이 없어지고, 또 어느 날 한 쪽 귀가 사라졌다. 남은 형체도 검은 펜으로 뭉개지고 있다. 그래도 그는 웃고 있다. 그는 위험 인물이다. 그가 저지른 위험한 일들이 어디선가 또 저질러지고 있다. 어디에서? 그는 어디에 있는가? 사진 속에서 그는 웃고 있다. 웃으며 이쪽을 넘보고 있다. 그도 자신을 찾고 있는 것이다. 그는 위험 인물이다. 그는 자신을 현상 수배한다. 이수명 시집 / 고양이 비디오를 보는 고양이

발코니의 시간 / 박은영

그림 / 박순희 발코니의 시간 / 박은영 필리핀의 한 마을에선 암벽에 철심을 박아 관을 올려놓는 장례법이 있다 고인은 두 다리를 뻗고 허공의 난간에 몸을 맡긴다 이까짓 두려움쯤이야 살아있을 당시 이미 겪어낸 일이므로 무서워 떠는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암벽을 오르던 바람이 관 뚜껑을 발로 차거나 철심을 휘어도 하얀 치아를 드러내고 그저 웃는다 평온한 경직, 아버지는 정년퇴직 후 발코니에서 화초를 키웠다 생은 난간에 기대어 서는 일 허공과 허공 사이 무수한 추락 앞에 내성이 생기는 일이라고 통유리 너머의 당신은 그저 웃는다 암벽 같은 등으로 아슬아슬 이우는 봄 붉은 시클라멘이 피었다 막다른 향기가 서녘의 난간을 오래 붙잡고 서있습니다 발아래 아득한 소실점 천적으로부터 훼손당하는 일은 없겠다 하얀 유골 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