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2022/06 30

등에 관하여 푼다 / 박순

그림 / 정금자 등에 관하여 푼다 / 박순 꺾인 허리를 반쯤 펴고 들어올린 들통 엿질금을 물에 담가 불리고 팍팍 문질러 꼬두밥 넣고 불앞에서 밤을 지새운 엄마 밥알이 껍질만 남긴 채 쏙 빠져나온듯 세상에서 젤루 어려운 것이 넘의 맴 얻는 거라며 투닥대지 말고 비위 맞춰 살라고 맴 단단히 붙들고 강단지게 살라고 했다 어여 가거라, 와이퍼처럼 손을 흔들며 겨울비 우산 속 키 작은 엄마는 어둠속으로 묻혀갔다 어매, 어쩌다 꼬드밥이 되야 불었소 시집 / 시작 (시시한 일상이 작품이 될 거예요)

가끔씩은 흔들려보는 거야 / 박성철

그림 / 김향희 가끔씩은 흔들려보는 거야 / 박성철 가끔씩은 흔들려보는 거야 흐르는 눈물을 애써 막을 필요는 없어 그냥 내 슬픔을 보여주는 거야 자신에게까지 숨길 필요는 없어 물이 고이면 썩어들어가는 것처럼 작은 상심이 절망이 될 때까지 쌓아둘 필요는 없어 상심이 커져가 그것이 넘쳐날 땐 스스로 비울 수 있는 힘도 필요한 거야 삶이 흔들리는 건 아직도 흘릴 눈물이 남았다는 건 내 삶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증거니까 가끔씩 흔들려보는 거야 하지만 허물어지면 안 돼 지금 내게 기쁨이 없다고 모든 걸 포기할 필요는 없어 늦게 찾아온 기쁨은 그만큼 늦게 떠나니까 시집 / 눈물편지

미래가 쏟아진다면 / 김소연

그림 / 송세라 미래가 쏟아진다면 / 김소연 나는 먼 곳이 되고 싶다 철로 위에 귀를 댄 채 먼 곳의 소리를 듣던 아이의 마음으로 더 먼 곳이 되기 위해선 무얼 해야 할까 꿈속이라면 아이가 될 수도 있다 악몽을 꾸게 될 수도 있다 몸은 자꾸 나침반 바늘처럼 떨리는 아이가 되어 무슨 잘못을 저질렀을까 봐 괴로워하면서 몸이 자꾸 깃발처럼 펄럭이는 아이가 되어 어리석은 사랑에 빠졌을까 봐 괴로워하면서 무녀리로 태어나 열흘을 살다 간 강아지의 마음으로 그 뭉근한 체온을 안고 무덤을 만들러 가는 아이였던 마음으로 꿈에서 깨게 될 것이다 울지 마, 울지 마 라며 찰싹찰싹 때리던 엄마가 실은 자기가 울고 싶어 그랬다는 걸 알아버린 아이가 될 것이다 그럴 때 아이들은 여기에 와서 모르는 사람에게 손을 흔든다 꿈이라면 ..

티셔츠에 목을 넣을 때 생각한다 / 유희경

그림 / 지경화 티셔츠에 목을 넣을 때 생각한다 / 유희경 티셔츠에 목을 넣을 때 생각한다 이 안은 비좁고 나는 당신을 모른다 식탁 위에 고지서가 몇 장 놓여 있다 어머니는 자신의 뒷모습을 설거지하고 있는 것이다 한 쪽 부엌 벽에는 내가 장식되어 있다 플라타너스 잎맥이 쪼그라드는 아침 나는 나로부터 날카롭다 서너 토막이 난다 이런 것을 너덜거린다고 말할 수 있을까 티셔츠에 목을 넣을 때 생각한다 면도를 하다가 그저께 벤 자리를 또 베였고 아무리 닦아도 몸에선 털이 자란다 타일은 오래되면 사람의 색을 닮는구나 베란다에 앉아 담배를 피우는 삼촌은 두꺼운 국어사전을 닮았다 얇은 페이지가 빠르게 넘어간다 뒷문이 지워졌다 당신이 찾아올 곳이 없어졌다 티셔츠에 목을 넣을 때 생각한다 간밤 당신 꿈을 꾼 덕분에 가슴..

바람과 놀다 / 나호열

그림 / 한정미 바람과 놀다 / 나호열 산 사람보다 죽은 사람이 더 많이 살고 있는 고향으로 갑니다 어느 사람은 서쪽으로 흘러가는 강이냐 묻고 어느 사람은 죽어서 날아가는 먼 서쪽하늘을 그리워합디다만 서천은 에둘러 굽이굽이 마음 적시고 꿈을 입힌 비단 강이 어머니 품속 같은 바다로 잦아드는 곳 느리게 닿던 역은 멀리 사라지고 역 앞 허름한 여인숙 어린 종씨는 어디서 늙고 있는지 누구에게 닿아도 내력을 묻지 않는 바람이 되어 혼자 울다가 옵니다 나호열 시집 / 안녕, 베이비 박스

고래가 일어서다 / 김은수

그림 / 김예순 고래가 일어서다 / 김은수 일상이 싱거워졌다. 바람 부는 날 바다는 고래가 된다 태풍이 불면 힘차게 일어서는 고래 수평선 넘어 잊었던 기억 등에 지고 성큼 타가서는 맷집에 모래사장은 오줌을 지리고 있다 고래가 날 세워 호통친다 바람을 맞잡고 일어서는 거품들 헤진 옷깃 깊숙이 젖어든다 순간 짠맛에 길들여진 고래 뱃속에서 일상이 속속 숨죽이며 벌떡 일어섰다. 2020 인사동 시인들 14호

살았능가 살았능가 / 최승자

그림 / 조분숙 살았능가 살았능가 / 최승자 살았능가 살았능가 벽을 두드리는 소리 대답하라는 소리 살았능가 죽었능가 죽지도 않고 살아 있지도 않고 벽을 두드리는 소리만 대답하라는 소리만 살았능가 죽었능가 삶이 무지근한 잠 오늘도 하루의 시계는 흘러가지 않고 있네 문태준 시집 / 시가 너에게 해답을 가져다줄 것이다.

꼭지켜야 할 일 ᆞ1 / 임승훈

그림 / 서문일초 꼭지켜야 할 일 ᆞ1 / 임승훈 십오 년 만에 장롱 서랍장 밑에서 찾아낸 아내의 얼굴 자국 먼지 먹은 원고지와 눈물 먹은 일기장 속에 그녀의 혼불이 살아 있었다 깨알 손글씨에 민낯을 드러낸 아내의 얼굴 긴 병마에 멍든 가슴 일기장에 남아 있고 두 아이의 사연이 눈가에 멍울져 있었다 밀물과 썰물에 밀려갔다 밀려오는 그녀의 숨겨진 그림자 일기 읽어보고 또 읽어 본다 나는 갯벌에 나와 물을 찾아 떠도는 물새 상처 난 외눈으로 아내의 눈물을 먹고 있는 눈물 새 무정하고 무심한 나비 꽃 당신 그래도 당신이 남기고 간 꼭 지켜야 할 일을 또 다시 보고 상처난 세월을 다시 꿰매고 있다 임승훈 시집 / 꼭, 지켜야 할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