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2022/07 22

물, 또는 내려가기 / 이태수

그림 / 심수진 물, 또는 내려가기 / 이태수 물을 마신다 아래로 내려가는 물, 나는 물과 더불어 흘러간다 물은 언제나 멈추기를 싫어한다 개울물이 아래로 흘러가고 강물은 몸을 비틀면서 내려간다 폭포는 수직으로 일어서듯 줄기차게 내리꽂힌다 물을 돌이켠다 안으로 스며드는 물, 새들이 낮게 날아 내리고 공중부양을 하던 뜬구름 몇 점이 제 무게 탓으로 떨어진다 가늘던 빗줄기가 점점 굵어지며 빗금으로 뛰어내린다 빗줄기를 바라보는 내가 내린다 이태수 시집 / 내가 나에게 *1947년 경북 의성 출신 *1974년 으로 등단 *천상병 문학상, 동서 문학상, 카톨릭 문학상

노인 보호 구역 / 이희명

그림/ 강애란 노인 보호 구역 / 이희명 미군부대 뒷길 눈 감아도 보이는 크고 붉은 글씨 '노인보호구역' 낙엽이 그 길을 걷고 있다 몸 반쪽에는 이미 겨울이 와 버린 가랑잎 같은 한 목숨이 흘림체로 걷고 있다 물고기가 지느러미를 흔들어 물속 길을 찾듯 뻣뻣한 팔로 허공에 노를 저으며 물풀 같은 그림자 따라 걷는다 체본 없이 완성한 그의 글씨체 벼루도 먹도 없어 맨몸으로 길바닥에 쓸 수밖에 없었던 그의 이력서 깊게 팬 이랑마다 수북이 쌓인 낙엽 걸음걸음 굽은 그림자 유서 같은 긴 편지를 쓰면서 간다 *2021 매일시니어문학상 당선작

돌멩이 하나 / 나호열

그림 / 송인숙 돌멩이 하나 / 나호열 길가에 뒹구는 돌멩이를 누구는 발로 차고 손에 쥐고 죄 없는 허공에 화풀이를 하네 볼품이 없어 이리저리 굴러다니지만 엄연히 불의 자손 하늘을 가르며 용트림하던 그 청춘의 불덩이를 잊지 않기 위해 안으로 얼굴을 감춘 갑각류의 더듬이처럼 엉금엉금 기어서 오늘도 날개를 꿈틀거리는 돌멩이 하나 나호열 시집 / 안부

카테고리 없음 2022.07.29

슬픔이 빛어낸 빛깔 / 최경선

그림 / 방선옥 슬픔이 빛어낸 빛깔 / 최경선 저토록 도도한 빛깔을 본적 없다 했다 한때는 핓빛처럼 고운 그 꽃잎이 눈부셔 까닭 없이 울었다 했다 애타게 향기로운 척해보고 꿈꾸듯 별을 품어 토해내고 알 수 없는 허허로움에 목메던 시절이었노라고 빛바래고 바래다, 오지게 말라비틀어져 가는 그 모양이 당신 모습 같아 더 섧고도 서럽다 했다 하다 하다, 끝내는 열정과 슬픔 버무린 듯한 저 도도함이 눈물겹지 않으냐며 옹이 박힌 등허리 성스럽게 웅크리며 그녀 고요히 똬리를 튼다 최경선 시집 / 그 섬을 떠나왔다 *붙임성 댓글은 정중하게 사양합니다.

우편함 / 김소연

그림 / 강애란 우편함 / 김소현 우리는 매일 이사를 했습니다 아빠에겐 날짜가 중요했고 나에겐 날씨가 중요했습니다 아빠에겐 지붕이 필요했고 나에겐 벽이 필요했습니다 네가 태어날 때 부친 편지가 왜 도착하질 않니 아무래도 난 여기서 살아야겠구나 우편함은 아빠의 집이 됩니다 서랍에는 아빠의 장기기증서가 있어 내가 최초로 받은 답장이 되었습니다 날짜는 불필요하게 자라나고 날씨는 불길하게 늙어가고 춥다는 말이 금지어가 되어갑니다 보름달이 떴다는 말은 사라져 갑니다 모르는 가축들이 바들바들 떨고 있습니다 아빠, 하고 부르려다 맙니다 김소연 시집 / 수학자의 아침 티스토리로 이사 왔습니다. 조금 헤매고 있습니다. 댓글 잠시 기다려 주시기 바랍니다.

구름에게 / 나호열

그림 / 김예순 구름에게 / 나호열 구름이 내게 왔다 아니 고개를 들어야 보이는 희미한 입술 문장이 될 듯 모여지다가 휘리릭 새떼처럼 흩어지는 낱말들 그 낱말들에 물음표를 지우고 느낌표를 달아주니 와르르 눈물로 쏟아지는데 그 눈물 속에 초원이 보이고, 풀을 뜯고 있는 양들의 저녁이 보인다 구름이 내게 왔다 하나이면서 여럿인, 이름을 부르면 사슴도 오고 꽃도 벙근다 구름의 화원에 뛰어든 저녁 해 아, 눈부셔라 한 송이 여인이 붉게 타오른다. 와인 한 잔의 구름, 긴 머리의 구름이 오늘 내게로 왔다 나호열 시집 /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노래를 알고 있다

능소화 / 오세영

능소화 / 오세영 배신의 상처가 얼마나 컸으면 이다지도 아름답더냐. 체념의 슬픔보다 고통의 쾌락을 선택한 꽃뱀이여, 네게 있어 관능은 사랑의 덫이다. 다리에서 허벅지로, 허벅지에서 가슴으로 칭칭 감아올라 마침내 낼룽거리는 네 혀가 내 입술을 감쌀 때 아아, 숨 막히는 죽음의 희열이여. 배신이란 왜 이다지도 징그럽게 아름답더냐. 시집 / 바이러스로 침투하는 봄

카테고리 없음 2022.07.14

마음이 깨어진다는 말 / 천양희

그림 / 최연 마음이 깨어진다는 말 / 천양희 남편이 실직으로 고개 숙인 그녀에게 엄마, 고뇌하는 거야? 다섯 살짜리 딸 아이가 느닷없이 묻는다 고뇌라는 말에 놀란 그녀가 고뇌가 뭔데? 되물었더니 마음이 깨어지는 거야, 한다 꽃잎 같은 아이의 입술 끝에서 재앙 같은 말이 나온 이 세상을 그녀는 믿을 수가 없다 책장을 넘기듯 시간을 넘기고 생각한다 깨어진 마음을 들고 어디로 가나 고뇌하는 그녀에게 아무도 아무 말 해주지 않았다 하루 종일 길모퉁이에 앉아 삶을 꿈꾸었다 천양희 시집 / 새벽에 생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