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2022/06 30

큰 산 / 나호열

그림 / 신길용 큰 산 / 나호열 어느 사람은 저 산을 넘어가려 하고 어느 사람은 저 산을 품으려 하네 어느 사람은 높아서 큰 산이라 하고 어느 사람은 품이 넓어 큰 산이라 하네 발힘이 흔들거려 쉬어야겠다 넘지도 안기지도 못하는 사람들 저 홀로 산이 되었네 넘지도 안을 수도 없는 산 내게도 있네 시집 /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노래를 알고 있다 남한강(단양)

밤하늘 / 차창룡

그림 / 김기정 밤하늘 / 차창룡 산 위에서 올려다보니 별 서너 개 저기 또 하나 잡으려면 어느새 숨어버리는 이처럼 내 마음을 간지르는 저 별 손톱으로 꼭 눌러 죽이고 싶은 마음의 가려움 내려다보니 이토록 많은 별들 꿈꾸는 눈빛에게 시간은 더디 흐른다 밤새도록 흘러도 늘 제자리인 저 강물 속 강물 위 가라앉아 있는 떠 있는 어린 시절 손톱으로 눌러 죽인 수많은 별들 여기 와 살아 있다니 시집 / 시가 나에게 살라고 한다

달밤 / 김수영

그림 / 김성임 달밤 / 김수영 언제부터인지 잠을 빨리 자는 습관이 생겼다 밤거리를 방황할 필요가 없고 착잡한 머리에 책을 집어들 필요가 없고 마지막으로 몽상을 거듭하기도 피곤해진 밤에는 시골에 사는 나는 달 밝은 밤을 언제부터인지 잠을 빨리 자는 습관이 생겼다 이제 꿈을 다시 꿀 필요가 없게 되었나 보다 나는 커단 서른아홉 살의 중턱에 서서 서슴치 않고 꿈을 버린다 피로를 알게 되는 것은 과연 슬픈 일이다 밤이여 밤이여 피로한 밤이여 시집 / 다시, 사랑하는 시 하나를 갖고싶다

나의 마음을 위해서라면 / 파블로 네루다

그림 / 오영희 나의 마음을 위해서라면 / 파블로 네루다 나의 마음을 위해서라면 당신의 가슴으로 충분합니다. 당신의 자유를 위해서라면 나의 날개로 충분합니다. 당신의 영혼 위에서 잠들고 있던 것은 나의 입으로부터 하늘로 올라갑니다. 매일의 환상은 당신 속에 있습니다. 꽃관에 맺혀 있는 이슬처럼 당신은 가만히 다가옵니다. 당신의 모습이 나타나지 않을 때 당신은 지평선을 파들어가고, 그리고 파도처럼 영원히 떠나갑니다. 소나무 돚대처럼 당신은 바람을 통해 노래합니다. 길 떠난 나그네처럼 갑자기 당신은 슬픔에 잠겨 버립니다. 옛길처럼 당신은 언제나 다정하고, 산울림과 향수의 노래가 당신을 부드럽게 안아 줍니다. 당신의 영혼 속에서 잠들던 새들이 날아갈 때, 그때야 나는 깊은 잠에서 깨어납니다. 시집 / 시가 있..

미워하지도 사랑하지도 / 하이린히 하이네

그림 / 석태린 미워하지도 사랑하지도 / 하이린히 하이네 그들은 나를 괴롭히고 노하게 하였다, 파랗게 얼굴이 질리도록. 어떤이는 나를 사랑해서, 어떤이는 나를 미워해서. 그들은 나의 빵에 독을 섞고 나의 잔에 독을 넣었다. 어떤이는 나를 사랑해서, 어떤이는 나를 미워해서. 그러나 나를 가장 괴롭히고 화나게하고 슬프게 한 바로 그 사람은 나를 미워하지도 사랑하지도 않았다. 시집 / 다시, 사랑하는 시 하나를 갖고싶다

사다리집 풍경 / 임승훈

그림 / 김경희 사다리집 풍경 / 임승훈 허공에 걸린 밧줄에 여덟 개의 발이 꺼꾸로 매달려 수없는 곡예를 반복하는 무공해 건축 기법 수학 공식은 잊지 않았는지 팔각형 모서리마다 줄을 걸고 자로 잰 듯 가지런하게 집을 짓는 건축사 모진 태풍에도 까딱없는 사다리 집 짓고 외줄타기하는 곡예사 작은 녀석이 맹랑하다 이슬 내린 보금자리에 아침 햇살이 내려왔다가 하얀 궁전 위에 핀 이슬 꽃이 되었다 진실과 거짓 사이에 숨어있는 모습이 밉지만 성실하게 사는 징그럽지만 귀여운 아이 임승훈 시집 / 꼭, 지켜야 할 일

타이탄 아룸 / 박순

그림 / 이영애 타이탄 아룸 / 박순 칠 년에 한 번씩 꽃피우는 타이탄 아룸 몸에서는 36도 열을 발산한다 동물 썪는 냄새가 난다 저 꽃, 칠 년 기다림으로 단 이틀을 견디다 점 하나로 스러져 갈 뿐이다 꽃잎보다 더 큰 기둥만 한 중심을 세우기 위해 시체 냄새를 피웠으리라 어찌 좋은 냄새만 갖고 살 수 있을까 당신과 타협하지 못한 가슴은 썩어 문드러진다 가슴앓이는 악취를 내며 입과 코를 움켜쥐게 한다 누군가는 나의 냄새를 좋아할 리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튕겨져 나오려는 시간 속에 중심을 세우려 애를 쓴다 *타이탄 아룸 : 적도 부근의 열대우림에 자생, 시체꽃으로 불림 박순 시집 / 페이드 인 (fade-in)

여승 / 백석

그림 / 심은구 여승 / 백석 여승은 합장(合掌)을하고 절을 했다 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 쓸쓸한 낯이 옛날같이 늙었다 나는 불공처럼 서러워졌다 평안도의 어늬 산 깊은 금덤판 나는 파리한 여인에게 옥수수를 샀다 여인은 나 어린 딸아이를 때리며 가을밤같이 차게 울었다 섭벌같이 나아간 지아비 기다려 십 년이 갔다 지아비는 돌아오지 않고 어린 딸은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 산 꿩도 설게 울은 슬픈 날이 있었다 산절의 마당귀에 여인의 머리오리가 눈물방울과 같이 떨어진 날이 있었다 시집 / 백석 시집 *일제 강점기 어려운 현실 배경으로 한 여인이 여승이 되기까지의 삶, 민족의 비극적 현실 반영 *가지취의 내음새 (속세와의 단절 / 후각적 심상) *금덤판 (금광/ 평안도 방언)

서글픈 바람 / 원태연

그림 / 손기옥 서글픈 바람 / 원태연 누가 오기로 한 것도 아니면서 누굴 기다리는 사람처럼 삐그덕 문소리에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다 누가 오기로 한 것도 아니면서 누굴 기다리는 사람처럼 두 잔의 차를 시켜놓고 막연히 앞 잔을 쳐다본다 누가 오기로 한 것도 아니면서 누굴 기다리는 사람처럼 마음속 깊이 인사말을 준비하고 그 말을 반복한다 누가 오기로 한 것도 아니며서 누굴 기다리는 사람처럼 나서는 발길 초라한 망설임으로 추억만이 남아 있는 그 찻집의 문을 돌아다본다. 원태연시집 / 그런 사람 또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