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2022/05 30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 / 이원하

그림 / 최신애 ​ ​ ​ ​ ​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 / 이원하 ​ ​ ​ 유월의 제주 종달리에 핀 수국이 살이 찌면 그리고 밤이 오면 수국 한 알을 따서 착즙기에 넣고 즙을 짜서 마실 거예요 수국의 즙 같은 말투를 가지고 싶거든요 그러기 위해서 매일 수국을 감시합니다 ​ 나에게 바짝 다가오세요 ​ 혼자 살면서 나를 빼곡히 알게 되었어요 화가의 기질을 가지고 있더라고요 매일 큰 그림을 그리거든요 그래서 애인이 없나 봐요 ​ 나의 정체는 끝이 없어요 ​ 제주에 온 많은 여행자들을 볼 때면 내 뒤에 놓인 물그릇이 자꾸 쏟아져요 이게 다 등껍질이 얇고 연약해서 그래요 그들이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앞으로 사랑 같은 거 하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 제주에 부는 바람 때문에 깃털이 다 뽑혔어요..

거미줄 / 이동호

그림 / 김경희 ​ ​ ​ ​ 거미줄 / 이동호 ​ ​ 누가 급하게 뛰어든 것처럼 내 방 벽 모서리에 동그랗게 파문 번진다 물속에 잠긴 것처럼 익숙한 것들이 낯설게 느껴진다 바깥의 누군가가 이 눅눅한 곳으로 나를 통째로 물수제비 뜬 것이 분명하다 곧 죽을 것처럼 호흡이 가빠왔다 삶의 밑바닥이 보이지 않았다 바닥으로 가라앉으면서 나는 나조차도 낯설게 느껴졌다 내가 잠든 사이 창을 통해 들어온 거미 덕분에, 내게도 수심이 생긴 것이다 ​ ​ ​ 이동호 시집 / 총잡이 ​ ​ ​ ​ ​ ​

반성 704 / 김영승

그림 / 권신아 ​ ​ ​ ​ 반성 704 / 김영승 ​ ​ ​ 밍키가 아프다 네 마리 새끼가 하도 젖을 파먹어서 그런지 눈엔 눈물이 흐르고 까만 코가 푸석푸석 하얗게 말라붙어 있다 닭집에 가서 닭 내장을 얻어다 끓여도 주어 보고 생선 가게 아줌마한테 생선 대가리를 얻어다 끓여 줘 봐도 며칠째 잘 안 먹는다 부엌 바닥을 기어 다니며 여기저기 똥을 싸 놓은 강아지들을 보면 낑낑낑 밍키를 보며 칭얼대는 네 마리 귀여운 강아지를 보면 나는 꼭 밍키의 남편 같다. ​ ​ ​ ​ 시집 / 어느 가슴엔들 시가 피지 않으랴 ​ ​ ​ ​

몇 번째 봄 / 이 병 률

그림 / 이정섭 ​ ​ ​ ​ 몇 번째 봄 / 이 병 률 ​ ​ 나무 아래 칼을 묻어서 동백나무는 저리도 불꽃을 동강동강 쳐내는구나 ​ 겨울 내내 눈을 삼켜서 벚나무는 저리도 종이눈을 뿌리는구나 ​ 봄에는 전기가 흘러서 고개만 들어도 화들화들 정신이 없구나 ​ 내 무릎 속에는 의자가 들어 있어 오지도 않는 사람을 기다리느라 앉지를 않는구나 ​ ​ ​ ​ 이병률 시집 / 바다는 잘 있습니다 ​ ​ ​ ​ ​

다리 / 정복여

그림 / 장순업 ​ ​ 다리 / 정복여 ​ ​ 강물 이라든지 꽃잎 이라든지 연애 그렇게 흘러가는 것들을 애써 붙들어보면 앞자락에 단추 같은 것이 보인다 가는 끝을 말아쥐고 부여잡은 둥긂 그 표면장력이 불끈 맺어놓은 설움에 꽁꽁 달아맨 염원의 실밥 ​ 바다로나 흙으로나 기억으로 가다 잠깐 여며보는 그냥...... 지금...... 뭐...... 그런 옷자락들 ​ 거기 흠뻑 발 젖은 안간힘의 다리가 보인다 ​ ​ ​ ​ 정복여 시집 / 체크무늬 남자 ​ ​ ​ ​ ​

뚝섬 / 신필영​

그림 / 유진주 ​ ​ ​ 뚝섬 / 신필영 ​ ​ 아마도 섬이 아니라 아비 같은 뚝 이었다 ​ 거름 내 후끈하던 배추밭 호박밭들 ​ 물살이 떠밀리지 않게 억척으로 막아서는 ​ 똥지게 나르던 어깨 다 삭아 길이 됐다 ​ 키가 크는 새 아파트 그 사이 꺾인 길로 ​ 불 켜진 몇 동 몇 호에 아비들이 숨어든다 ​ ​ ​ *1983년 신춘문예로 등단 *이우호 시조 문학상 *시집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