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2022/04 28

​창밖은 오월인데 / 피천득

그림 / 송태관 ​ ​ ​ 창밖은 오월인데 / 피천득 ​ ​ 창밖은 오월인데 너는 미적분을 풀고 있다 그림을 그리기에도 아까운 순간 라일락 향기가 짙어 가는데 너는 아직도 모르나 보다 잎사귀 모양이 심장인 것을 크리스탈 같은 미(美)라 하지만 정열보다 높은 기쁨이라 하지만 수학은 아무래도 수녀원장 가시에도 장미가 피어나는데 '컴퓨터'는 미소가 없다 마리도 너도 고행의 딸 ​ ​ 피천득 시집 / 창밖은 오월인데 ​ ​ ​ ​ ​

기쁨 Die Freuden / 괴테

그림 / 강민혜 ​ ​ ​ ​​ 기쁨 Die Freuden / 괴테 ​ ​ 우물가에서 잠자리 한 마리 명주 천 같은 고운 날개를 팔랑거리고 있다. 진하게 보이다가 연하게도 보인다. 카멜레온같이 때로는 빨갛고 파랗게, 때로는 파랗고, 초록으로, 아, 가까이 다가가서 그 빛깔을 바로 볼 수 있다면, ​ 그것이 내 곁을 슬쩍 지나가서 잔잔한 버들가지에 앉는다. 아, 잡았다! 찬찬히 살펴보니 음울한 짙은 푸른빛. ​ 온갖 기쁨을 분석하는 그대도 같은 경우를 맞게 되리라. ​ ​ ​ ​ 시집 / Johann Wolfgang von Goethe 괴테 시집 ​ ​ ​ ​ ​

​어떤 싸움의 기록 / 이성복

그림 / 조셉 라이트 ​ ​ ​ 어떤 싸움의 기록 / 이성복 ​ 그는 아버지의 다리를 잡고 개새끼 건방진 자식 하며 비틀거리며 아버지 셔츠를 찢어발기고 아버지는 주먹을 휘둘러 그의 얼굴을 내리쳤지만 나는 보고만 있었다 그는 또 눈알을 부라리며 이 씨발놈아 비겁한 놈아 하며 아버지 팔을 꺾었고 아버지는 겨우 그의 모가지를 문 밖으로 밀쳐냈다 나는 보고만 있었다 그는 신발을 신은 채 마루로 다시 기어올라 술병을 치켜들고 아버지를 내리 찍으려 할 때 어머니와 큰 누나와 작은 누나의 비명, 나는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의 땀 냄새와 술 냄새를 맡으며 그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소리 질렀다 죽여버릴 테야 법도 모르는 놈 나는 개처럼 울부짖었다 죽여버릴테야 별은 안 보이고 갸웃이 열린 문틈으로 사람들의 얼굴이 라일락 꽃..

​어스름을 기리는 노래 / 정현종

그림 / 박혜숙 ​ ​ ​ 어스름을 기리는 노래 / 정현종 ​ ​ ​ 땅거미 지면서 세계는 풍부해진다! ​ 어스름에 잠기는 나무들 오래된 석조 건물들 어슴푸레 수은등 불빛 검푸른 하늘이 표구해내는 어스름의 깊이 ​ 어스름은 깊고 깊다 인제 서로 닿지 않는 게 없고 인제 차별이 없다 (풍부하다는 건 차별이 없다는 것이다) 내 몸은 지나치게 열려있다 ​ 허공이 그렇듯이, 내 손에 만져지지 않는 거란 없다 물이 그렇듯이...... ​ 한없이 자라는 손 ​ ​ ​ ​ 정현종 시집 / 사랑 할 시간이 많지 않다. ​ ​ ​

종을 만드는 마음으로 / 이어령

그림 / 진옥 ​ ​ ​ 종을 만드는 마음으로 / 이어령 ​ ​ ​ 대장장이가 범종을 만들듯이 그렇게 글을 써라. 온갖 잡스러운 쇠붙이를 모아서 불로 녹인다. 무디고 녹슨 쇳조각들이 형체를 잃고 용해되지 않으면 대장장이는 망치질을 못한다. ​ 걸러서는 두드리고 두드리고는 다시 녹인다. 그러다가 쇳조각은 종으로 바뀌어 맑은 목청으로 운다. 망치로 두드릴 때의 쇳소리가 아니다. ​ 사냥꾼이 한 마리의 꿩을 잡듯이 그렇게 글을 써라. 표적을 노리는 사냥꾼의 총은 시각과 청각과 촉각과 그리고 후각의 모든 감각의 연장(延長)이고 연장(道具)이다. ​ 묶여 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움직이고 숨는 것을 향해 쏘아야 한다. 또 돌진해 오는 것들을 쏘아야 한다. 표적에서 빗나가는 사냥꾼은 총대를 내리지 않고 또다른 숲을 ..

​졸업사진 / 마경덕

그림 / 박혜숙 ​ ​ ​ ​ 졸업사진 / 마경덕 ​ ​ ​ 운동장에 모인 우리들 층층이 나무의자를 쌓고 줄을 맞추고 키 작은 나는 맨 앞줄 가운데 앉았다 얌전히 두 손을 무릎에 얹고 ​ 사진사가 사진을 찍으려는 찰나, 선생님이 내 이름을 불렀다 ​ 고무신을 신었으니 뒤로 가라고, ​ 운동화 신은 키 큰 아이를 불러서 내 자리에 앉혔다 ​ 초등학교 앨범을 펼쳐도 맨 뒷줄 내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 까치발로 서 있던 부끄러운 그 시간이 흑백사진 속 어딘가에 숨어있다 ​ ​ ​ ​ 마경덕 시집 / 악어의 입속으로 들어가는 밤 ​ ​ ​

거울의 습관 / 마경덕

그림 / 김광현 ​ ​ ​ ​ 거울의 습관 / 마경덕 ​ ​ ​ 주름 많은 여자가 주름치마를 입고 거울 앞에 서 있어요 ​ 얼굴을 마주하면 불편한 거울과 솔직해서 속상한 여자의 사이에 주름이 있습니다 ​ 한때 미모로 주름잡던 여자는 두 손으로 구겨진 얼굴을 펴고 거울은 한사코 나이를 고백합니다 수시로 양미간에 접힌 기분은 흔적으로 남았습니다 ​ 주름진 치마는 몇 살일까요 저 치마도 찡그린 표정입니다 ​ 치마는 주름 이전만 기억하고 얼굴은 왜 주름 이후만 기억하는 걸까요 ​ 거울처럼 매끈해지려는 여자는 굳어진 표정을 마사지로 수선 중입니다 ​ 접혀서 아름다운 건 커튼과 꽃잎, 프릴과 아코디언, 사막의 모래물결, 샤페이, 기다림을 꼽는 손가락.... ​ 거울이 겉주름을 보여줄 때 속주름은 더 깊어집니다 여자..

실패의 힘 / 천양희

그림 / 박혜숙 ​ ​ ​ ​ 실패의 힘 / 천양희 ​ ​ ​ 내가 살아질 때까지 아니다 내가 사라질 때까지 나는 애매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 비가 그칠 때까지 철저히 혼자였으므로 나는 홀로 우월했으면 좋겠다 ​ 지상에는 나라는 아픈 신발이 아직도 걸어가고 있으면 좋겠다 오래된 실패의 힘으로 그 힘으로 ​ ​ ​ ​ 천양희 시집 / 새벽에 생각하다 ​ ​ ​ ​ ​ 이재호 갤러리

​태양에서 뛰어내렸습니다 / 정현종

그림 / 송태관 ​ ​ ​ ​ 태양에서 뛰어내렸습니다 / 정현종 ​ ​ ​ 싹이 나오고 꽃이 피었어요 나는 부풀고 부풀다가 그냥 태양에서 뛰어내렸습니다 뛰어내렸어요 태양에서 (생명의 기쁨이요?) 달에 바람을 넣어 띄우고 땅에도 바람을 넣어 그 탄력 위에서 벙글거렸지요 ​ 인제 할 일은 하나 아주 꽃 속으로 뛰어드는 일, 그야 거기 들어있는 태양들을 내던지겠습니다 향기롭고, 붉고, 푸르게 ​ ​ ​ ​ 시집 / 살아갈 시간이 많지 않다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