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2022/03 18

알맞은 거리 / 나호열

그림 / 알프레드 시슬레 ​ ​ ​ ​ 알맞은 거리 / 나호열 ​ ​ ​ 너는 거기에 나는 이 자리에 ​ 당신 곁에 머물면 화상(火傷)을 입고 당신 곁을 떠나면 동상(凍傷)에 걸린다 ​ 그래서 길이 태어나고 너른 들판이 뛰어오지 눈빛으로 팔을 건네는 아득하지 않은 거리 아늑한 거리 ​ 그 여백은 아쉬움이 아니라 그리움으로 번지는 점자로 읽는 바람 채찍이 춤추는 알맞은 거리 ​ ​ ​ ​ 나호열/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노래를 알고 있다 (시인 동네) ​ ​ ​ ​

빈잔 / 임성구

그림 / 박지숙 ​ ​ ​ 빈잔 / 임성구 ​ ​ 내 앞에 놓여있는 쓸쓸한 너를 두고 무엇을 채워줄까 고민하다 잠이 들었네 마셔도 비워지지 않는 향긋한 술이 떠도네 ​ 봄은 피고 지고 맵게 울던 매미도 가고 발갛게 익은 가을과 설국의 계절 보내놓고 또다시 한 바퀴의 잔을, 채우면서 웃어보네 ​ 화무에 취해버린 내 잠꼬대에 걷어차여 쏟아진 너의 생애 얼마나 많이 아플까 미안타, 마음 하나 못 채워 헛꽃만 뭉텅 피네 ​ ​ *미안타 : 미안하다 (방언) ​ ​ 임성구 시조집 현대시조 100인선 시집 가 있음 ​ ​ ​ ​

감나무 / 이재무

그림 / 김정수 ​ ​ ​ 감나무 / 이재무 ​ ​ ​ 감나무 저도 소식이 궁금한 것이다 그러기에 사립 쪽으로는 가지도 더 뻗고 가을이면 그렁그렁 매달아 놓은 붉은 눈물 바람결에 슬쩍 흔들려도 보는 것이다 저를 이곳에 뿌리박게 해 놓고 주인은 삼십 년을 살다가 도망 기차를 탄 것이 그새 십오 년인데.... 감나무 저도 안부가 그리운 것이다 그러기에 봄이면 새순도 담장 너머 쪽부터 내밀어 틔워 보는 것이다 ​ ​ ​ ​ 시집 / 애송시 100편 한국 대표 시인이 100명이 추천한 ​ ​ ​ ​

눈부처 / 정호승

그림 / 유영국 ​ ​​ ​ ​ 눈부처 / 정호승 ​ ​ ​ 내 그대 그리운 눈부처 되리 그대 눈동자 푸른 하늘가 잎새들 지고 산새들 잠든 그대 눈동자 들길 밖으로 내 그대 일평생 눈부처 되리 그대는 이 세상 그 누구의 곁에도 있지 못하고 오늘도 마음의 길을 걸으며 슬퍼하노니 그대 눈동자 어두운 골목 바람이 불고 저녁별 뜰 때 내 그대 일평생 눈부처 되리 ​ ​ ​ ​ ​ 정호승 시집 / 너를 사랑해서 미안하다 ​ ​ ​ ​

동물을 위한 나라는 없다 /정끝별

그림 / 최 석 원 ​ ​ ​ 동물을 위한 나라는 없다 /정끝별 ​ ​ ​ 소 눈이라든가 낙타 눈이라든가 검은 눈동자가 꽉 찬 눈을 보면 내가 너무 많은 눈을 굴리며 산 것 같아 ​ 남의 등에 올라타지 않고 남의 눈에 눈물 내지 않겠습니다 ​ 타조 목이라든가 기린 목이라든가 하염없이 기다란 목을 보면 내가 너무 많은 걸 삼키며 사는 것 같아 ​ 남의 살을 삼키지 않고 남의 밥을 빼앗지 않겠습니다 ​ 펭귄 다리라든가 바다코끼리 다리라든가 버둥대는 짧은 사지를 보면 나는 내가 더 많은 죄를 짓고 살 것 같아 ​ 우리에 갇혀 있거나 우리에 실려 가거나 우리에 깔리거나 우리에 생매장당하는 더운 목숨들을 보면 ​ 우리가 너무 무서운 사람인 것만 같아 ​ ​ ​ ​ 시집 / 오늘의 시 *2020 작가가 선정한 오늘..

슬픈 버릇 / 허 연

사진 / 이영렬 ​ ​ ​ 슬픈 버릇 / 허 연 ​ ​ 가끔씩 그리워 심장에 손을 얹으면 그 심장은 없지. 이제 다른 심장으로 살아야지. ​ 이제 그리워하지 않겠다고 덤덤하게 이야기 하면 공기도 우리를 나누었죠. 시간의 화살이 멈추고 비로소 기억이 하나씩 둘 씩 석관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뚜껑이 닫히면 일련번호가 주어지고 제단위로 들어 올려져 이별이 됐어요. 그 골목에 남겼던 그림자들도, 틀리게 부르던 노래도, 벽에 그었던 빗금과, 모두에게 바쳤던 기도와 화장장의 연기와 깜박이던 가로등도 안녕히. 보라빛 꽃들이 깨어진 보도블럭 사이로 고개를 내밀 때, 쌓일 새도 없이 날아가버린 것들에 대해 생각했어요. 이름이 지워진 배들이 정박해있는 포구에서 명치 부근이 이상하게 아팠던 날 예감했던 일들. 당신은 왜 물..

화요일花曜日 / 김남규

그림 / 김세환 ​ ​ ​ ​ 화요일花曜日 / 김남규 ​ ​ 하늘은 필 듯 말 듯 손그늘에 드나들고 흘리듯이 말해도 서로를 흠뻑 적시며 떼쓰는 봄날, 봄의 날 소꿉놀이 허밍처럼 ​ 우리는 지는 사람 진다고 흔들리는 사람 저수지 한 바퀴 돌면 계절 하나 바뀌겠지 꽃나비 가만 내려앉듯 마음 툭 치는 일몰 한 점 ​ ​ ​ ​ 김남규 시인 *충남 천안 출신. 2008년신춘 문예 시조 당선. 가람시조문학상 신인상 외 수상. 시조집 등과, 연구서가 있음. ​ ​ ​ ​ ​ ​

운주사에서 / 정호승

그림 / 김미옥 ​ ​ ​ 운주사에서 / 정호승 ​ ​ ​ 꽃 피는 아침에는 절을 하여라 피는 꽃을 보고 절을 하여라 걸어가던 모든 길을 멈추고 사랑하는 사람과 나란히 서서 부처님께 절을 하듯 절을 하여라 ​ ​ 꽃 지는 저녁에도 절을 하여라 지는 꽃을 보고 절을 하여라 돌아가던 모든 길을 멈추고 헤어졌던 사람과 나란히 서서 와불님께 절을 하듯 절을 하여라 ​ ​ ​ ​ 정호승 시집 / 너를 사랑해서 미안하다 ​ ​ ​ ​

객짓밥 / 마경덕

그림 / 장문자 ​ ​ ​ ​ 객짓밥 / 마경덕 ​ ​ ​ 하나님은 저 소금쟁이 한 마리를 물 위에 띄우려고 다리에 촘촘히 털을 붙이고 기름칠을 하고 수면에 표면장력을 만들고 ​ 소금쟁이를 먹이려고 죽은 곤충을 연못에 던져주고 물위에 넘어지지 말라고 쩍 벌어진 다리를 네 개나 달아주셨다 ​ 그래도 마음이 안 놓여 연못이 마르면 다른 데 가서 살라고 날개까지 주셨다 ​ 우리 엄마도 서울 가서 밥 굶지 말고, 힘들면 편지하라고 취직이 안 되면 남의 집에서 눈칫밥 먹지 말고 그냥 집으로 내려오라고 기차표 한 장 살 돈을 내 손에 꼭 쥐여주었다 그 한마디에 객짓밥에 넘어져도 나는 벌떡 일어섰다 ​ ​ ​ ​ 마경덕 시집 / 악어의 입속으로 들어가는 밤 ​ ​ ​ ​ ​

꽃 피는 아버지 / 이성복

그림 / 서정철 꽃 피는 아버지 / 이성복 아버지 만나러 금촌 가는 길에 쓰러진 나무 하나를 보았다 흙을 파고 세우고 묻어주었는데 뒤돌아보니 또 쓰러져 있다 저놈은 작부처럼 잠만 자나? 아랫도리 하나로 빌어먹다 보니 자꾸 눕고 싶어지는가 보다 나도 자꾸 눕고 싶어졌다 나는 내 잠 속에 나무 하나 눕히고 금촌으로 갔다 아버지는 벌써 파주로 떠났다 한다 조금만 일찍 와도 만났을 텐데 나무가 웃으며 말했다 고향 따앙이 여어기이서 몇 리이나 되나 몇 리나 되나 몇리나되나..... 학교 갔다 오는 아이들이 노래 불렀다 내 고향은 파주가 아니야 경북 상주야 나무는 웃고만 있었다 그날 밤 아버지는 쓰러진 나무처럼 집에 돌아왔다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아버지가 말했다 너는 내가 떨어뜨린 가랑잎이야 이성복 시집 / 뒹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