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2022/03 18

바람의 말 / 마종기

그림 / 정우민 ​ ​ ​ ​ 바람의 말 / 마종기 ​ ​ 우리 모두가 떠난 뒤 내 영혼이 당신 옆을 스치면 설마라도 봄 나뭇가지 흔드는 바람이라 생각지는 마. ​ 나 오늘 그대 알았던 땅 그림자 한 모서리에 꽃나무 하나 심어 놓으려니 그 나무 자라서 꽃 피우면 우리가 알아서 얻은 모든 괴로움이 꽃잎 되어서 날아가 버릴 거야. ​ 꽃잎 되어서 날아가 버린다. 참을 수 없게 아득하고 헛된 일이지만 어쩌면 세상 모든 일을 지척의 자로만 재고 살 건가. ​ 가끔 바람 부는 쪽으로 귀 기울이면 착한 당신, 피곤해져도 잊지 마, 아득하게 멀리서 오는 바람의 말을. ​ ​ ​ 애송시 100편 시집 / 어느 가슴엔들 시가 꽃피지 않으랴 1 ​ ​ ​ ​ ​ ​

절벽에 대한 몇가지 충고 / 정호승

그림 / 신 영숙 ​ ​ ​ 절벽에 대한 몇가지 충고 / 정호승 ​ ​ 절벽을 만나거든 그만 절벽이 되라 절벽 아래로 보이는 바다가 되라 절벽 끝에 튼튼하게 뿌리를 뻗은 저 솔가지 끝에 앉은 새들이 되라 ​ 절벽을 만나거든 그만 절벽이 되라 기어이 절벽을 기어오르는 저 개미떼가 되라 그 개미떼들이 망망히 바라보는 수평선이 되라 ​ 누구나 가슴속에 하나씩 절벽은 있다 언젠가는 기어이 올라가야 할 언젠가는 기어이 내려와야 할 외로운 절벽이 하나씩 있다 ​ ​ ​ ​

수선화는 피었는데 / 이 효

​ ​ ​ 수선화는 피었는데 / 이 효 ​ ​ 창문을 열어 놓으니 봄바람이 곱게 머리를 빗고 마당에 내려앉는구나 ​ ​ 마당에 노란 수선화가 활짝 피었는데 창문에 걸터앉아 꽃을 바라보시던 어머니의 모습은 구름처럼 간데없구나 ​ ​ 수선화도 서러운지 봄 노래를 부르려다 하늘에 쉼표 하나 그린다 꽃버선 신고 떠나신 하늘길 어머니 얼굴 수선화처럼 화안하다 ​ ​ ​ ​ ​ ​ 어머니! 일 년 반 동안 암 투병을 하셨습니다. ​ 한 통에 전화를 받았다. 쓰러진 나무를 세워 보았지만 나무는 뜨거운 화장터를 찾아야 했다. 코로나로 서울에는 회장 터가 없단다. 태백까지 다녀오란다. 미친 세상인지는 알았지만 내가 먼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 어머니 병상에 누워 계실 때 오미크론 확산이 심했다. 병원에 입원하자마자 ..

절벽 위의 키스 / 문정희

그림 / 소순희 ​ ​ ​ ​ 절벽 위의 키스 / 문정희 ​ ​ ​ 바닷가 절벽위에서 절박하게 서로를 흡입하던 그 키스 아직 그대로 있을까 칠레 시인의 집, 야자수 줄지어 선 낭떠러지 부릉거리는 모터사이클 곁에 세워두고 싱싱한 용설란 가시 치솟은 사랑 흰 언덕들 흰 넓적다리 절벽 아래로 굴러 떨어졌을까 사랑은 짧고 망각은 길어 독재와 혁명처럼 성난 파도 속으로 밀려갔을까 거품으로 깨어지고 말았을까 기념관 속 시인이 벗어 둔 옷보다 위대한 문장보다 살아서 위험하고 아름다운 절벽 위의 키스 아직 타오르고 있을까 늙은 아이 하나 키우고 있을까 ​ ​ ​ ​ 시집 / 2020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시 ​ ​ ​ ​ ​ ​ ​

바늘귀 / 김영재

그림 / 안호범 ​ ​ ​ ​ 바늘귀 / 김영재 ​ ​ ​ 뾰족한 송곳을 바늘이라 하지 않는다 바늘귀가 없으면 바늘이 될 수 없다 바늘은 찌르기도 하지만 아픈 곳 꿰매준다 나는 누구의 상처 꿰맨 일 있었던가 찌그리고 헤집으며 상처 덧나게 했지 손 끝에 바늘귀 달아 아픈 너 여미고 싶다 ​ ​ ​ 김영재시집 / 목련꽃 벙그는 밤 ​ ​ ​ ​

봄비 / 이경임

그림 / 김미옥 ​ ​ ​ 봄비 / 이경임 ​ ​ 빗방울들은 무겁다 어떤 빗방울들은 꽃잎처럼 부드럽지만 이 빗방울들은 메스처럼 날카롭다 ​ 이 빗방울들은 핏방울처럼 무겁지 않다 이 빗방울은 새끼 고양이의 울음소리처럼 나른하다 ​ 비가 캄캄한 늑골 속에서 야옹야옹 내린다 비가 고양이의 하품처럼 빈터를 뒹군다 ​ 나는 늑골 속에서 무언가를 도려내야 할지도 모른다 너는 움직이지 않고 늑골 속에 죽은 듯이 붙어 있고 싶은 것이다 ​ 빈터에는 싱싱한 것들이 생각 없이 쑥쑥 돋아난다 ​ ​ ​ ​ 시집 / 겨울 숲으로 몇 발자국 더 ​ ​ ​ ​ ​

강물을 따라가며 울다 / 정호승

그림 / 구본준 ​ ​ ​ ​ 강물을 따라가며 울다 / 정호승 ​ ​ 내 몸 속에 석가탑 하나 세워놓고 내 꿈속에 다보탑 하나 세워놓고 어느 눈 내리는 날 그 석가탑 쓰러져 어느 노을지는 날 그 다보탑 와르르 무너져내려 눈 녹은 물에 내 간을 꺼내 씻다가 눈 녹은 물에 내 심장을 꺼내 씻다가 그만 강물에 흘려보내고 울다 몇날 며칠 강물을 따라가며 울다 ​ ​ ​ ​ ​ 정호승 시집 / 너를 사랑해서 미안하다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