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문학이야기/명시

​어떤 싸움의 기록 / 이성복

푸른 언덕 2022. 4. 28. 18:32

그림 / 조셉 라이트

어떤 싸움의 기록 / 이성복

 

그는 아버지의 다리를 잡고 개새끼 건방진 자식 하며 비틀거리며 아버지 셔츠를 찢어발기고 아버지는 주먹을 휘둘러 그의 얼굴을 내리쳤지만 나는 보고만 있었다

그는 또 눈알을 부라리며 이 씨발놈아 비겁한 놈아 하며

아버지 팔을 꺾었고 아버지는 겨우 그의 모가지를 문 밖으로 밀쳐냈다 나는 보고만 있었다 그는 신발을 신은 채

마루로 다시 기어올라 술병을 치켜들고 아버지를 내리 찍으려 할 때 어머니와 큰 누나와 작은 누나의 비명,

나는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의 땀 냄새와 술 냄새를 맡으며

그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소리 질렀다 죽여버릴 테야

법도 모르는 놈 나는 개처럼 울부짖었다 죽여버릴테야

별은 안 보이고 갸웃이 열린 문틈으로 사람들의 얼굴이 라일락 꽃처럼 반짝였다 나는 또 한 번 소리 질렀다

이 동네는 법도 없는 동네냐 법도 없어 법도 그러나 나의 팔은 죄 짓기 싫어 가볍게 떨었다 근처 시장에서 바람이 비린내를 몰아왔다 문 열어 두어라 되돌아올 때까지 톡, 톡 물 듣는 소리를 지우며 아버지는 말했다

이성복 시집 /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