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2022/04 28

단추 / 이인주

그림 / 최길용 ​ ​ ​ ​ ​ 단추 / 이인주 ​ ​ ​ 단추의 생명은 구멍이다 그 좁고 캄캄한 구멍속으로 흘러들어간 환한 실오라기들이 얼마나 단단한 결속의 언약인지 ​ 구멍이 없는 것들은 모른다 소통이란 한 가닥 실오라기 같은 것 입술에서 입술로 뚫린 이음줄이 오감을 올려내는 둥근 탄성을 ​ 몸이 열리는 맨 처음의 자리와 마음이 닫히는 맨 끝자리에 단추가 있고 원죄 같은 구멍 속으로 흘러온 역사는 사실 단추의 역사인데 그 풀고 잠그는 형태가 능히 한 서사를 바꾸기도 한다 ​ ​ ​ ​ 시집 / 초중도 ​ ​ ​ ​ 이인주 *2003년 신춘문예 당선 제8회 평사리문학대상 수상, 시집 ​ ​ ​ ​ ​ ​ ​ ​ ​

봄비 / 박형준​

그림 / 정미라 ​ ​ ​​ 봄비 / 박형준 ​ ​ ​ 당신은 사는 것이 바닥으로 내려가는 것과 비슷하다고 했다. 내게는 그 바닥을 받쳐줄 사랑이 부족했다. 봄비가 내리는데, 당신과 닭백숙을 만들어 먹던 겨울이 생각난다. 나를 위해 닭의 내장 안에 쌀을 넣고 꿰매던 모습, 나의 빈자리 한 땀 한 땀 깁는 당신의 서툰 바느질, 그 겨울 저녁 후후 불어먹던 실 달린 닭백숙 ​ ​ ​ ​ 박형준 시집 / 생각날 때마다 울었다 ​ ​ ​ 박형준 1991년 산춘문예 당선, 미당 문학상 수상 시집 외 9권 ​ ​ ​ ​

까닭 / 나태주

그림 / 박혜숙 ​ ​ ​ 까닭 / 나태주 ​ ​ ​ 꽃을 보면 아, 예쁜 꽃도 있구나! 발길 멈추어 바라본다 때로는 넋을 놓기도 한다 ​ 고운 새소리 들리면 어, 어디서 나는 소린가? 귀를 세우며 서 있는다 때로는 황홀하기까지 하다 ​ 하물며 네가 내 앞에 있음에야! ​ 너는 그 어떤 세상의 꽃보다도 예쁜 꽃이다 너의 음성은 그 어떤 세상의 새소리보다도 고운 음악이다 ​ 너를 세상에 있게 한 신에게 감사하는 까닭이다. ​ ​ ​ ​ ​ 시집 / 나태주 대표 시선집 ​ ​ ​ ​

존재에 대한 단상 / 신현복

그림 / 신동권 ​ ​ ​ ​ 존재에 대한 단상 / 신현복 ​ ​ ​ 지구를 축(軸)으로 우주가 돌아가는 것은 아니지만 지구는 우주에서 성심이다 ​ 자전하면서 필요한 만큼의 중력을 갖고 공전한다 ​ 어느 위치에서도 우주의 중심이다 ​ 세상사(事)에서의 나도 그렇다 ​ 너 또한 그렇다 ​ 존재한다는 것은 중심에 있다는 의미다 ​ 그럼에도 중심이 축이거나 축이 중심이어야 하는 것은 꼭 아니다 ​ ​ ​ 신현복 *1964년 충남 당진 출생 *2005년 등단 *시집 ​ ​ ​ ​ ​ ​

그림자 / 천양희

그림 / 송태관 ​ ​ ​ ​ ​ 그림자 / 천양희 ​ ​ 마음에 지진이 일어날 때마다 마른가지 몇개 분질렀습니다 그래도 꺾이지 않는 건 마음입니다 마음을 들고 오솔길에 듭니다 바람 부니 풀들이 파랗게 파랑을 일으킵니다 한해살이 풀을 만날 때쯤이면 한 시절이 간다는 걸 알겠습니다 나는 그만 풀이 죽어 마음이 슬플 때는 지는 해가 좋다고 말하려다 그만두기로 합니다 오솔길은 천리로 올라오는 미움이란 말을 지웁니다 산책이 끝나기 전 그늘이 서늘한 목백일홍 앞에 머뭅니다 꽃그늘 아래서 적막하게 웃던 얼굴이 떠오릅니다 기억은 자주 그림자를 남깁니다 남긴다고 다 그림자이겠습니까 '하늘 보며 나는 망연히 서 있었다' 어제 써놓은 글 한줄이 한 시절의 그림자인 것만 같습니다 ​ ​ ​ ​ *목백일홍 (배롱나무) 배롱나..

사람의 됨됨이 / 박경리

그림 / 이대선화 ​ ​ ​ ​ 사람의 됨됨이 / 박경리 ​ ​ 가난하다고 다 인색한 것은 아니다 부자라고 모두가 후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사람의 됨됨이에 따라 다르다 ​ 후함으로 하여 삶이 풍성해지고 인색함으로 하여 삶이 궁색해 보이기도 하는데 생명들은 어쨌거나 서로 나누며 소통하게 돼 있다 그렇게 아니하는 존재는 길가에 굴러 있는 한낱 돌멩이와 다를 바 없다 ​ 나는 인색함으로 하여 메마르고 보잘것없는 인생을 더러 보아 왔다 심성이 후하여 넉넉하고 생기에 찬 인생도 더러 보아 왔다 ​ 인색함은 검약이 아니다 후함은 낭비가 아니다 인색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 위해 낭비하지만 후한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는 준열하게 검약한다 ​ 사람 됨됨이에 따라 사는 세상도 달라진다 후한 사람은 늘 성취감을 맛보지만 인색한..

너에게 가는 길 / 이 사 랑​

그림 / 이 혜 진 ​ ​ ​ 너에게 가는 길 / 이 사 랑 ​ ​ 사막에서 낙타는 한 그루 나무다 ​ 나그네가 나무 그늘에 기대어 생각한다 ​ 추상적 사랑이라는 신기루 그것이 행복이라고 착각하는 ​ 사람이 사람을 사랑할 때만큼 외로울 때가 또 있을까? ​ 나무와 걸어가는 사막에 모래바람이 분다 ​ 너를 찾아가는 길 참, 멀다! ​ ​ ​ 이사랑 시집 / 적막 한 채 ​ ​ *2009년 계간 등단,수주문학, 대상수상 시집 ​ ​ ​

​살아 있다는 것 / 드니스 레버토프

그림 / 박혜숙 ​ ​​ ​ 살아 있다는 것 / 드니스 레버토프 ​ ​ ​ 잎사귀와 풀잎 속 불이 너무나 푸르다, 마치 여름마다 마지막 여름인 것처럼 ​ 바람 불어와, 햇빛 속에 전율하는 잎들, 마치 모든 날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 연약한 발과 긴 꼬리로 꿈꾸는 듯 움직이는 붉은색 도룡뇽 ​ 너무 잡기 쉽고, 너무 차가워 손을 펼쳐 놓아준다, 마치 ​ 매 순간이 마지막 순간인 것처럼 ​ ​ ​ ​ 시집 / 마음 챙김의 시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