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문학이야기/명시

그림자 / 천양희

푸른 언덕 2022. 4. 15. 15:41

그림 / 송태관

그림자 / 천양희

 

마음에 지진이 일어날 때마다

마른가지 몇개 분질렀습니다

그래도 꺾이지 않는 건 마음입니다

마음을 들고 오솔길에 듭니다

바람 부니 풀들이 파랗게 파랑을 일으킵니다

한해살이 풀을 만날 때쯤이면

한 시절이 간다는 걸 알겠습니다

나는 그만 풀이 죽어

마음이 슬플 때는 지는 해가 좋다고

말하려다 그만두기로 합니다

오솔길은 천리로 올라오는

미움이란 말을 지웁니다

산책이 끝나기 전

그늘이 서늘한 목백일홍 앞에 머뭅니다

꽃그늘 아래서 적막하게 웃던 얼굴이 떠오릅니다

기억은 자주 그림자를 남깁니다

남긴다고 다 그림자이겠습니까

'하늘 보며 나는 망연히 서 있었다'

어제 써놓은 글 한줄이

한 시절의 그림자인 것만 같습니다

*목백일홍 (배롱나무)

배롱나무 꽃은 여름에서 가을까지 계속 핀다

 

시집 / 지독히 다행한 <창비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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