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2022/05 31

모자이크 / 박은영

그림 / 최연 모자이크 / 박은영 모자 가정이 되었다 정권이 바뀌고 수급비가 끊기자 국밥 한 그릇 사 먹을 돈이 없었다 아홉살 아이는 식탐이 많았다 24시간 행복포차식당에서 두루치기로 일을 하고 눈만 붙였다가 등만 붙였다가 엉덩이만 붙였다가, 부업을 했다 아이가 손톱을 물어뜯을 땐 국밥 먹고 싶다는 말이 나올까봐 야단을 쳤다 반쪽짜리 해를 보며 침을 삼키던 아이는 일찍 침묵하는 법을 배웠다 찢어진 날들을 붙이면 어떤 계절이 될까 내가 있는 곳은 멀리서 보면 그림이 된다고 했지만 밀린 인형 눈알을 붙이며 가까이 보았다 초점이 맞지 않아 희부옇게 보이는 내일, 아이의 슬픔이 가려지고 조각조각, 조각조각 깍두기 먹는 소리가 들렸다 박은영 시집 / 구름은 울 준비가 되었다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 / 이원하

그림 / 최신애 ​ ​ ​ ​ ​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 / 이원하 ​ ​ ​ 유월의 제주 종달리에 핀 수국이 살이 찌면 그리고 밤이 오면 수국 한 알을 따서 착즙기에 넣고 즙을 짜서 마실 거예요 수국의 즙 같은 말투를 가지고 싶거든요 그러기 위해서 매일 수국을 감시합니다 ​ 나에게 바짝 다가오세요 ​ 혼자 살면서 나를 빼곡히 알게 되었어요 화가의 기질을 가지고 있더라고요 매일 큰 그림을 그리거든요 그래서 애인이 없나 봐요 ​ 나의 정체는 끝이 없어요 ​ 제주에 온 많은 여행자들을 볼 때면 내 뒤에 놓인 물그릇이 자꾸 쏟아져요 이게 다 등껍질이 얇고 연약해서 그래요 그들이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앞으로 사랑 같은 거 하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 제주에 부는 바람 때문에 깃털이 다 뽑혔어요..

거미줄 / 이동호

그림 / 김경희 ​ ​ ​ ​ 거미줄 / 이동호 ​ ​ 누가 급하게 뛰어든 것처럼 내 방 벽 모서리에 동그랗게 파문 번진다 물속에 잠긴 것처럼 익숙한 것들이 낯설게 느껴진다 바깥의 누군가가 이 눅눅한 곳으로 나를 통째로 물수제비 뜬 것이 분명하다 곧 죽을 것처럼 호흡이 가빠왔다 삶의 밑바닥이 보이지 않았다 바닥으로 가라앉으면서 나는 나조차도 낯설게 느껴졌다 내가 잠든 사이 창을 통해 들어온 거미 덕분에, 내게도 수심이 생긴 것이다 ​ ​ ​ 이동호 시집 / 총잡이 ​ ​ ​ ​ ​ ​

반성 704 / 김영승

그림 / 권신아 ​ ​ ​ ​ 반성 704 / 김영승 ​ ​ ​ 밍키가 아프다 네 마리 새끼가 하도 젖을 파먹어서 그런지 눈엔 눈물이 흐르고 까만 코가 푸석푸석 하얗게 말라붙어 있다 닭집에 가서 닭 내장을 얻어다 끓여도 주어 보고 생선 가게 아줌마한테 생선 대가리를 얻어다 끓여 줘 봐도 며칠째 잘 안 먹는다 부엌 바닥을 기어 다니며 여기저기 똥을 싸 놓은 강아지들을 보면 낑낑낑 밍키를 보며 칭얼대는 네 마리 귀여운 강아지를 보면 나는 꼭 밍키의 남편 같다. ​ ​ ​ ​ 시집 / 어느 가슴엔들 시가 피지 않으랴 ​ ​ ​ ​

몇 번째 봄 / 이 병 률

그림 / 이정섭 ​ ​ ​ ​ 몇 번째 봄 / 이 병 률 ​ ​ 나무 아래 칼을 묻어서 동백나무는 저리도 불꽃을 동강동강 쳐내는구나 ​ 겨울 내내 눈을 삼켜서 벚나무는 저리도 종이눈을 뿌리는구나 ​ 봄에는 전기가 흘러서 고개만 들어도 화들화들 정신이 없구나 ​ 내 무릎 속에는 의자가 들어 있어 오지도 않는 사람을 기다리느라 앉지를 않는구나 ​ ​ ​ ​ 이병률 시집 / 바다는 잘 있습니다 ​ ​ ​ ​ ​

다리 / 정복여

그림 / 장순업 ​ ​ 다리 / 정복여 ​ ​ 강물 이라든지 꽃잎 이라든지 연애 그렇게 흘러가는 것들을 애써 붙들어보면 앞자락에 단추 같은 것이 보인다 가는 끝을 말아쥐고 부여잡은 둥긂 그 표면장력이 불끈 맺어놓은 설움에 꽁꽁 달아맨 염원의 실밥 ​ 바다로나 흙으로나 기억으로 가다 잠깐 여며보는 그냥...... 지금...... 뭐...... 그런 옷자락들 ​ 거기 흠뻑 발 젖은 안간힘의 다리가 보인다 ​ ​ ​ ​ 정복여 시집 / 체크무늬 남자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