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2022/05 31

봄의 미안 / 이은규

그림 / 송태관 ​ ​ ​ 봄의 미안 / 이은규 ​ 누가 봄을 열었을까, 열어줬을까 ​ 허공에서 새어나온 분홍 한 점이 떨고 있다 바다 밑 안부가 들려오지 않고, 않고 있는데 ​ 덮어놓은 책처럼 우리는 최선을 다해 세상에서 가장 이기적인 말을 반복한다 미안未安 ​ 잘못을 저지른 내 마음이 안녕하지 못하는 말 이제 그 말을 거두기로 하자, 거두자 ​ 슬플 때 분홍색으로 몸이 변한다는 돌고래를 본 적이 있다 모든 포유류는 분홍분홍 울지도 모른다 ​ 오는 것으로 가는 봄이어서 언제나 4월은 기억투쟁 특별구간이다 그렇게 봄은 열리고 열릴 것 ​ 인간적인 한에서 이미 약을 선택한 거라고 말한다면 그때 바다에 귀 기울이자 슬픔은 날마다 새로 태어나는 그 무엇이어서 봄은 먼 분홍을 가까이에 두고 사라질 것 ​ 성급한..

물의 뺨을 쳤다 / 정일근​​

그림 / 진옥 ​ ​ 물의 뺨을 쳤다 / 정일근 ​ ​ 산사서 자다 일어나 물 한 잔 떠먹었다 산에서 흘러 돌확에 고이는 맑은 물이었다 물 마시고 무심코 바가지 툭, 던졌는데 찰싹, 물의 뺨치는 소리 요란하게 울렸다 돌확에 함께 고인 밤하늘의 정법과 수많은 별이 제자리를 지키던 율이 사라졌다 죄였다, 큰 죄였다 법당에서 백여덟 번 절 마치고 돌아올 때까지 물의 뺨은 퉁퉁 부어 식지 않았다 ​ ​ ​ 정일근 시집 / 소금 성자 ​ ​ *경남 진해 출생 *1985년 신춘문예 당선 *시집 *소금 성자는 열두 번째 시집이다 *경남대학 문과대학 문화콘텐즈학과 교수 ​ ​ ​ 동강

사는 게 참 꽃 같아야 / 박제영

그림 / 송태관 ​ ​ ​ 사는 게 참 꽃 같아야 / 박제영 ​ ​ 며느리도 봤응게 욕 좀 그만해야 정히 거시기 해불면 거시기 대신에 꽃을 써야 그까짓 거 뭐 어렵다고, 그랴그랴 아침 묵다 말고 마누라랑 약속을 했잖여 ​ 이런 꽃 같은! 이런 꽃나! 꽃까! 꽃 꽃 꽃 반나절도 안 돼서 뭔 꽃들이 그리도 피는지 ​ 봐야 사는 게 참 꽃 같아야 ​ ​ ​ *시집 / 그까짓 게 모라고 ​ ​ ​

진화론을 읽는 밤 / 나호열

이재호 갤러리 ​ ​ ​ 진화론을 읽는 밤 / 나호열 ​ ​ 냉장고에서 꺼낸 달걀은 진화론의 지루한 서문이다 무정란의 하루가 거듭될수록 저 커다란 눈물 한 덩이의 기나긴 내력을 통째로 삶거나 짓이기고 싶은 약탈의 가여움을 용서하고 싶지 않다 비상을 포기한 삶은 안락을 열망한 실수 사막으로 쫓겨 온 낙타 아버지와 초원을 무작정 달리는 어머니의 말 그렇게 믿었던 맹목의 날들이 닭대가리 조롱으로 메아리친다 다시 나를 저 야생의 숲으로 보내다오 삶에서 쫓기며 도망치다 보면 날개에 힘이 붙고 휘리릭 창공을 박차 올라 매의 발톱에 잡히지 않으려는 수만 년이 지나면 쓸데없는 군살과 벼슬을 버린 진화론의 서문이 너무 길어 달걀을 깨버리는 이 무심한 밤 ​ ​ 2022년, 스토리 문학 108호 ​ ​ 이재호 갤러리

실패의 힘 / 천양희

그림 / 박혜숙 ​ ​ ​ 실패의 힘 / 천양희 ​ ​ 내가 살아질 때까지 아니다 내가 사라질 때까지 나는 애매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 비가 그칠 때까지 철저히 혼자였으므로 나는 홀로 우월했으면 좋겠다 ​ 지상에는 나라는 아픈 신발이 아직도 걸어가고 있으면 좋겠다 오래된 실패의 힘으로 그 힘으로 ​ ​ ​ ​ 천양희 시집 / 새벽에 생각하다 ​ ​ ​ ​왕방산 전망대

​절망을 뜯어내다 / 김양희

그림 / 진옥 ​ ​ ​ 절망을 뜯어내다 / 김양희 ​ ​ 우리를 탈출한 고릴라가 돌아다닌다 ​ 어떻게 나갔어 대체 비결이 뭐야 ​ 절망을 하루에 한 칸씩 나도 몰래 뜯었지 ​ 절망을 뜯어냈다고? 절망을 뜯어냈다고! ​ 오타를 고치려다 눈이 주운 어휘 한 잎 ​ 절망을 하루에 한 줌 몰래 뜯어내야지 ​ ​ *1964년, 제주 한림 귀덕 출생 *2016년, 시조시학 신인상 *2019년, 정음 시조 문학상 수상 *2019, 한국가사문학대상 특별상 ​ ​ ​

선운사 / 민병도

그림 / 송태관 선운사 / 민병도 때늦은 꽃맞이에 대웅전이 헛간이네 부처 보기 만망한 시자侍者 마저 꽃구경 가고 절 마당 홀로 뒹구는 오금저린 풍경소리 무시로 생목 꺾어 투신하는 동백꽃 앞에 너도나도 돌아앉아 왁자하던 말을 버리네 짓다 만 바람 집 한 채 그마저도 버리네 비루한 과거 따윈 더 이상 묻지도 않네 저마다 집을 떠나 그리움에 닿을 동안 오던 길 돌려보내고 나도 잠시 헛간이네 경북 청도 출생. 1976년신춘문예 등단. 시집 등 22권이 있음. 계간발행인(사)국제 시조 협회 이사장.

제왕나비 / 최동호​

그림/ 박정용 ​ ​ ​ 제왕나비 / 최동호 ​ ​ 파도 위로 호랑무늬 깃을 펼치며 대지를 움켜진 나비가 날고 있다 대양 너머 저 멀고 먼 산언덕에서 작은 들꽃 무리들이 피었다 지면서 비바람 헤치고 찾아올 나비를 기다리고 구름 뒤의 달은 나뭇잎에 매달려 쪽잠 자며 고치에서 부활하는 영혼을 지켜보고 있다 ​ ​ ​ 전문 ​ ​ *최동호 -1948년 경기 수원 출생 -197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박두진 문학상 수상 ​ ​ ​

도마의 구성 / 마경덕

그림 / 이철규 ​ ​ ​ 도마의 구성 / 마경덕 ​ ​ 나무도마에게 딸린 식구는 혼자 사는 여자와 칼 하나 닭집 여자는 칼에게 공손하고 칼은 도마를 얕본다 서열은 칼, 여자, 도마 도마는 늙었고 칼은 한참 어리다 칼받이 노릇에 잔뼈가 물러버린 도마는 칼 하나와 애면글면 둘 사이에 죽은 닭이 끼어들면 한바탕 치고 받는다 내리치는 서슬에 나이테가 끊어지고 이어 찬물 한 바가지 쏟아진다 닭이 사라져도 도마를 물고 있는 칼 칼은 언제나 도마 위에서 놀고 도마는 칼집투성이다 이 조합은 맞지 않아요 도마가 애원해도 여자는 늘 도마를 무시하고 칼은 여전히 버릇이 없다 어디서 굴러온 막돼먹은 칼을 여자는 애지중지 받는다 ​ ​ ​ 마경덕 시집 / 악어의 입속으로 들어가는 밤 ​ ​ 이재호 갤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