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 박순희 발코니의 시간 / 박은영 필리핀의 한 마을에선 암벽에 철심을 박아 관을 올려놓는 장례법이 있다 고인은 두 다리를 뻗고 허공의 난간에 몸을 맡긴다 이까짓 두려움쯤이야 살아있을 당시 이미 겪어낸 일이므로 무서워 떠는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암벽을 오르던 바람이 관 뚜껑을 발로 차거나 철심을 휘어도 하얀 치아를 드러내고 그저 웃는다 평온한 경직, 아버지는 정년퇴직 후 발코니에서 화초를 키웠다 생은 난간에 기대어 서는 일 허공과 허공 사이 무수한 추락 앞에 내성이 생기는 일이라고 통유리 너머의 당신은 그저 웃는다 암벽 같은 등으로 아슬아슬 이우는 봄 붉은 시클라멘이 피었다 막다른 향기가 서녘의 난간을 오래 붙잡고 서있습니다 발아래 아득한 소실점 천적으로부터 훼손당하는 일은 없겠다 하얀 유골 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