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2022/07 22

사랑 / 오세영

그림 / 김미혜 사랑 / 오세영 세상사는 일이 무엇이던가 우주는 자연을 기르고, 자연은 생명을 기르고, 생명은 사랑을 기르고, 사랑은 또 우주를 기르나니 저 무심한 바위도 홀로 이끼를 기르지 않던가. 혹독한 추위를 견디며 바위가 금 가지 않으려, 깨지지 않으려 버티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 억만년 지구를 감싸안고 도는 태양의 사랑이여. 오세영 시화선집 / 바이러스로 침투하는 봄

명태 / 박은영

그림 / 한부열 명태 / 박은영 삼천포항 남해식당 메뉴는 생태찌개 한 가지다 늙은 여주인은 오늘 팔 한 궤짝의 생선을 육두문자로 손질한다 도마가 움푹 파이도록 칼질을 해도 비린내 나는 바닥 벗어날 길 없다며 어두운 지느러미를 내리친다 해로를 잃은 배 한 척, 삼천포 앞바다에 남자를 내어주고 그녀는 오살할 명태를 도마에 올렸다 긁어낸 내장과 대가리를 그러모으는 밤이면 삼천포대교를 건너지 못 한 날 들 이 뚝배기에서 진한 국물로 끓어올랐다 살점을 발라낸 초승달이 눈시울에서 오래 따끔거렸다 끼니때가 되자 넘실거리는 식당 안, 창난젓 명란젓 서리젓 사이 곰삭은 욕을 밥술에 얹어먹는 간간한 하루, 싱거운 농담들은 삼천포로 빠지고 닻을 올린 손님상마다 뱉어낸 토막 뼈가 수북하다 어느 것 하나 버릴 게 없는 생이다 ..

편지 / 김남조

그림 / 정선희 편지 / 김남조 그대만큼 사랑스러운 사람을 본 일이 없다 그대만큼 나를 외롭게 한 이도 없었다 이 생각을 하면 내가 꼭 울게 된다 그대만큼 나를 정직하게 해준 이가 없었다 내 안을 비추는 그대는 제일로 영롱한 거울 그대의 깊이를 다 지나가면 글썽이는 눈매의 내가 있다 나의 시작이다 그대에게 매일 편지를 쓴다 한 구절을 쓰면 한 구절을 와서 읽는 그대 그래서 이 편지는 한 번도 부치지 않는다 시집 / 시가 나에게 살라고 한다

이 순간 / 피천득

그림 / 김기정 이 순간 / 피천득 이 순간 내가 별들을 쳐다본다는 것은 그 얼마나 화려한 사실인가 오래지 않아 내 귀가 흙이 된다 하더라도 이 순간 내가 제9교향곡을 듣는다는 것은 그 얼마나 찬란한 사실인가 그들이 나를 잊고 내 기억 속에서 그들이 없어진다 하더라도 이 순간 내가 친구들과 웃고 이야기한다는 것은 그 얼마나 즐거운 사실인가 두뇌가 기능을 멈추고 내 손이 썩어가는 때가 오더라도 이 순간 내가 마음 내키는 대로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은 허무도 어찌하지 못할 사실이다. 시집 / 마음이 예뻐지는 시

인생 / 라이너 마리아 릴케

그림 / 한정림 인생 /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인생을 꼭 이해할 필요는 없다 인생은 축제와 같은 것 길을 걷는 아이가 바람이 불 때마다 꽃잎들의 선물을 받아들이듯 하루하루 일어나는 그대로 맞이하라 아이는 꽃잎을 모아 간직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다 머리카락에 행복하게 머문 꽃잎들을 가볍게 털어버리고 아름다운 젊은 시절을 향해 새로운 꽃잎을 달아 두 손을 내민다 시집 / 자기 돌봄의 시

찬밥 / 문정희

그림 / 박연숙 찬밥 / 문정희 아픈 몸을 일으켜 혼자 찬밥을 먹는다 찬밥 속에 서릿발이 목을 쑤신다 부엌에는 각종 전기제품이 있어 일 분만 단추를 눌러도 따끈한 밥이 되는 세상 찬밥을 먹기도 쉽지 않지만 오늘 혼자 찬밥을 먹는다 가족에겐 따스한 밥 지어 먹이고 찬밥을 먹는 사람 이 빠진 그릇에 찬밥 훑어 누가 남긴 무 조각에 생선 가시를 핥고 몸에서는 제일 따스한 사랑을 뿜던 그녀 깊은 밤에도 혼자 달그닥거리던 그 손이 그리워 나 오늘 아픈 몸 일으켜 찬밥을 먹는다 집집마다 신을 보낼 수 없어 신 대신 보냈다는 설도 있지만 홀로 먹는 찬밥 속에서 그녀를 만났다 나 오늘 세상의 찬밥이 되어 문정희 시집 / 내 안에 새를 꺼내주세요 이재호 갤러리

마음 한 철 / 박 준

그림 / 최선옥 마음 한 철 / 박 준 미인은 통영에 가자마자 새로 머리를 했다 귀밑을 타고 내려온 머리가 미인의 입술에 붙었다가 떨어졌다 내색은 안 했지만 나는 오랜만에 동백을 보았고 미인은 처음 동백을 보는 것 같았다 "우리 여기서 한 일 년 살다 갈까?" 절벽에서 바다를 보던 미인의 말을 나는 "여기가 동양의 나폴리래" 하는 싱거운 말로 받아냈다 불어오는 바람이 미인의 맑은 눈을 시리게 했다 통영의 절벽은 산의 영정과 많이 닮아 있었다 미인이 절벽 쪽으로 한 발 더 나아가며 내 손을 꼭 잡았고 나는 한 발 뒤로 물러서며 미인의 손을 꼭 잡았다 한철 머무는 마음에게 서로의 전부를 쥐어주던 때가 우리에게도 있었다 박준 시집 /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통영

俗離山에서 / 나희덕

그림 / 안승완 俗離山에서 / 나희덕 가파른 비탈만이 순결한 싸움터라고 여겨온 나에게 속리산은 순하디순한 길을 열어 보였다 산다는 일은 더 높이 오르는 게 아니라 더 깊이 들어가는 것이라는 듯 평평한 길은 가도가도 제자리 같았다 아직 높이에 대한 선망을 가진 나에게 세속을 벗어나도 세속의 습관은 남아 있는 나에게 산은 어깨를 낮추며 이렇게 속삭였다 산을 오르고 있지만 내가 넘는 건 정작 산이 아니라 산 속에 갇힌 시간일 거라고, 오히려 산 아래서 밥을 끓여 먹고 살던 그 하루 하루가 더 가파른 고비였을 거라고, 속리산은 단숨에 오를 수도 있는 높이를 길게길게 늘여서 내 앞에 펼쳐 주었다 시집 / 그곳이 멀지 않다

카테고리 없음 2022.07.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