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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俗離山에서 / 나희덕

푸른 언덕 2022. 7. 4. 19:14

 

그림 / 안승완

 

 

 

俗離山에서 / 나희덕

 

 

가파른 비탈만이

순결한 싸움터라고 여겨온 나에게

속리산은 순하디순한 길을 열어 보였다

산다는 일은

더 높이 오르는 게 아니라

더 깊이 들어가는 것이라는 듯

평평한 길은 가도가도 제자리 같았다

아직 높이에 대한 선망을 가진 나에게

세속을 벗어나도

세속의 습관은 남아 있는 나에게

산은 어깨를 낮추며 이렇게 속삭였다

산을 오르고 있지만

내가 넘는 건 정작 산이 아니라

산 속에 갇힌 시간일 거라고,

오히려 산 아래서 밥을 끓여 먹고 살던

그 하루 하루가

더 가파른 고비였을 거라고,

속리산은

단숨에 오를 수도 있는 높이를

길게길게 늘여서 내 앞에 펼쳐 주었다

 

 

 

시집 / 그곳이 멀지 않다

<민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