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문학이야기/명시

티셔츠에 목을 넣을 때 생각한다 / 유희경

푸른 언덕 2022. 6. 16. 19:14

 

그림 / 지경화

 

 

 

 

티셔츠에 목을 넣을 때 생각한다 / 유희경

<2008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티셔츠에 목을 넣을 때 생각한다

이 안은 비좁고 나는 당신을 모른다

식탁 위에 고지서가 몇 장 놓여 있다

어머니는 자신의 뒷모습을 설거지하고 있는 것이다

한 쪽 부엌 벽에는 내가 장식되어 있다

플라타너스 잎맥이 쪼그라드는 아침

나는 나로부터 날카롭다 서너 토막이 난다

이런 것을 너덜거린다고 말할 수 있을까

 

티셔츠에 목을 넣을 때 생각한다

면도를 하다가 그저께 벤 자리를 또 베였고

아무리 닦아도 몸에선 털이 자란다

타일은 오래되면 사람의 색을 닮는구나

베란다에 앉아 담배를 피우는 삼촌은

두꺼운 국어사전을 닮았다

얇은 페이지가 빠르게 넘어간다

뒷문이 지워졌다 당신이 찾아올 곳이 없어졌다

 

티셔츠에 목을 넣을 때 생각한다

간밤 당신 꿈을 꾼 덕분에

가슴 바깥으로 비죽하게 간판이 하나 걸려진다

때절은 마룻바닥에선 못이 녹슨 머리를 박는 소리

아버지를 한 벌의 수저와 묻었다

내가 토닥토닥 두둘기는 춥지 않은 당신의 무덤

먼지들의 하얀 뒤꿈치가 사각거린다

 

 

 

 

<유희경>

*1980년 서울 출생

*2000년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 졸업

*2007년 신작희곡 페스티벌 당선

*2008년 한국예술종합학교 극작과 졸업

*200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