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웅 / 박송이 그림 / 정현영 배웅 / 박송이 이 세상에 없는 당신들에게 구걸하면서 헛바퀴로 돌바퀴로 구르던 시절들아 쇠창살에 갇힌 개처럼 짓다가 컹컹컹 식어가던 밥그릇들아 막 구워낸 프린터 복사지처럼 아주 잠깐 달궈졌던 몸뚱어리들아 밥 한 술 떠 먹여 주지 않던 길고 가벼운 절망들아 빠진 머리카락들아 안녕히 가세요 *지성의 상상 미네르바 (2023봄호) 문학이야기/명시 2023.07.27
끈 / 도창회 사진 / 이효 끈 / 도창회 끈의 자유는 곧지 않고 휘이는 것이다 끈의 생명은 단절이 아니라 연결이다 끈의 속성은 얽어매고 푸는 일이다 끈의 임무는 자유가 아니고 구속이다 끈의 고독은 찾으면 없을 때이고 끈의 환희는 없다가도 찾아질 때이다 끈의 존재 양식은 늘이고 늘어지는 데 있다 도창회 시집 / 무영탑 문학이야기/명시 2023.07.26
마지막 시선 / 이현경 그림 / 송미정 마지막 시선 / 이현경 한 사람이 떠났다 같이 보았던 청잣빛 하늘이 마지막 시선이 될 줄이야 별만큼 먼 외로움에 떠난 자리가 아프다 고추잠자리 한 마리가 영문도 모르고 이별의 점선이 그어진 모서리에 내려앉는다 그리움은 증발되지 못해 쌓여만 가고 벌레 먹은 잎마다 아픔이 스며있듯이 구멍난 가슴에는 이별의 통증이 고여 있다 하늘을 이고 내려온 잠자리 날개의 고운 빛깔처럼 소용돌이치던 아픔이 다시 수평으로 나란히 머물면 얼마나 좋을까 이현경 시집 / 허밍은 인화되지 않는다 문학이야기/명시 2023.07.25
강물 / 천상병 그림 / 김미자 강물 / 천상병 강물이 모두 바다로 흐르는 그 까닭은 언덕에 서서 내가 온종일 울었다는 그 까닭만은 아니다 밤새 언덕에 서서 해바라기처럼, 그리움에 피던 그 까닭만은 아니다 언덕에 서서 내가 짐승처럼 서러움에 울고 있는 그 까닭은 강물이 모두 바다로만 흐르는 그 까닭만은 아니다 시집 / 한국인이 좋아하는 명시 100선 문학이야기/명시 2023.07.24
하얀 민들레 / 이효 사진 / 하얀 민들레 하얀 민들레 / 이효 며칠 동안 비가 내렸다 민들레 밭에 무성한 풀들 모질게 과거를 뽑는 노모 언제 뽑았느냐는 듯 잡초는 그녀를 조롱하고 질기게 올라오는 상념들 내가 너무 오래 살았어 빨리 죽어야 해 손주 닮은 하얀 꽃 때문에 목숨 줄, 꼭 잡고 있는 어머니 문학이야기/자작시 2023.07.23
천변 아이 / 박준 천변 아이 / 박준 게들은 내장부터 차가워진다 마을에서는 잡은 게를 바로 먹지 않고 맑은 물에 가둬 먹이를 주어가며 닷새며 열흘을 더 길러 살을 불린다 아이는 심부름길에 몰래 게를 꺼내 강물에 풀어준다 찬 배를 부여잡고 화장실에 가는 한밤에도 낮에 마주친 게들이 떠올라 한두 마리 더 집어 들고 강으로 간다 박준 시집 /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 있겠습니다 문학이야기/명시 2023.07.22
고향에 핀 도라지꽃 / 이 효 고향에 핀 도라지꽃 / 이 효 밥상에 오른 도라지나물 고향 생각난다 할머니 장독대 도라지꽃 어린 손녀 잔기침 소리 배를 품은 도라지 속살 달빛으로 달여 주셨지 세월이 흘러 삐걱거리는 구두를 신은 하루 생각나는 고향의 보랏빛 꿈 풍선처럼 부푼 봉오리 두 손가락으로 지그시 누르면 펑하고 터졌지 멀리서 들리는 할머니 목소리 애야, 꽃봉오리 누르지 마라 누군가 아프다 아침 밥상에 도라지나물 고향 생각하면 쌉쏘름하다 문학이야기/자작시 2023.07.21
첫사랑 / 괴테 그림 / 박인호 첫사랑 / 괴테 아 누가 돌려주랴, 그 아름다운 날 그 첫사랑의 날을. 아, 누가 돌려주랴 그 아름다운 시절의 그 사랑스러운 때를, 쓸쓸히 나는 이 상처를 키우며 끊임없이 되살아나는 슬픔에 잃어버린 행복을 슬퍼하고 있으니 아, 누가 돌봐주랴 그 아름다운 나날 첫사랑 그 즐거운 때를. 시집 /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명시 100선 문학이야기/명시 2023.07.20
여름은 거울이다 / 이 효 그림 / 정계향 여름은 거울이다 / 이 효 벌은 연꽃 속으로 길을 내고 여자는 푸른 숲으로 길을 낸다 오래된 고목과 마주 앉아 수행하는 여자의 침묵은 맑다 연꽃은 물에 얼굴을 비춰보고 여자는 하늘에 마음을 비춰보고 여름은 서로에게 거울이 된다 이 효 시집 / 당신의 숨 한 번 문학이야기/자작시 2023.07.19
감자 이야기 / 조은설 그림 / 김정숙 감자 이야기 / 조은설 -고흐의 감자 먹는 사람들 춘삼월 햇빛 좋은 날은 온 가족이 밭에 나가 감자를 심는다 감자는 눈 하나에 햇살 한 수저 땀방울도 모아들여 감자밭에 묻는다 하지 무렵이면 흰 달이 땅속 줄기마다 알을 슬어 열두 덩이씩 부풀어 오르는데 산달이 된 밭고랑마다 해산을 시작한다 낡은 저녁 식탁엔 한 접시 수북한 달의 알들 벽에 걸린 램프 등은 흐뭇한 미소를 후광처럼 걸어 주고 포실포실 살진 달 베어 먹은 만큼 행복도 자라는 달 지금쯤 지붕 위엔 달빛 한 동이 엎어지려고 풀벌레 소리가 달빛보다 희게 젖고 있을 것이다 출처 / 지성의 상상 미네르바 문학이야기 2023.07.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