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문학이야기 1388

어느 개인 날 / 이어령

그림 / 박은영 어느 개인 날 / 이어령 태양은 혼자의 힘으로 빛나는 것은 아니다. 비나 구름 그리고 어둠과 함께 있을 때 빛은 비로소 빛이 된다. 사막의 모래알을 비출 때 태양은 저주지만 풀잎 이슬 위로 쏟아지면 축복이다. 태양이 이슬에 젖는 순간마다 태양빛은 새로워진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밤을 주신 것이 아니라 밤을 통해 새벽의 빛을 주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홍수를 주신 것이 아니라 홍수로 인해 아름다운 무지개를 주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죽음을 주신 것이 아니라 죽음으로 하여 아름다워지는 생명을 주신 것이다. 태양은 흑점의 어둠이 있어 빛나는 것이다. 이어령 시집 / 어느 무신론자의 기도

당신의 여백은 침묵이 아니다 / 조은설

작품 / 김명희 당신의 여백은 침묵이 아니다 / 조은설 당신의 여백은 나에게 참 많은 말을 한다 모서리에 앉은 나를 하염없이 귀 기울이게 하지 말보다 더 많은 말을 하는 여백 달은 아직 떠오르지 않았는데 이마가 환하다 가난한 영혼이 잠시 쉬어가는 당신의 뜨락 새벽 별들이 까치발로 걸어와 발치에 눕는다 내 간절함의 무게를 끌고 웜홀을 통과하던 기도 소리가 잠시 허리를 펴는 시간 허공의 질긴 목마름을 건너가고 있다 당신에게 가는 길 *웜홀 ; 블랙홀과 화이트홀로 연결된 우주 내의 통로 *출처 / 지성의 상상 미네르바 (2023년 봄)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 푸슈킨

그림 / 방선옥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 푸슈킨 비록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서러워하거나 노하지 마라. 슬픔의 날엔 마음 가다듬고 자신을 믿으라. 이제 곧 기쁨의 날이 오리라. 마음은 내일에 사는 것 오늘 비록 비참할지라도 모든 것은 순간적이며 그것들은 한결같이 지나가 버리고 지나간 것은 값진 것이다. 시집 / 한국인이 가장 사라한 명시 100선

저녁의 계보 / 김병호

그림 / 김두엽 ​ ​ ​ ​ 저녁의 계보 / 김병호​ ​ ​ ​ 바꿔 내온 잔에도 금이 있었지만 뒤돌아서는 여주인의 맨발을 보고는 말을 삼켰다 ​ 창마다 고인 저녁 밖에선 계집아이 하나가 누군가를 기다리는 모양이다 ​ 제 몸에 그믐을 새긴 잔이나 뒤늦게 이혼을 이야기하는 아버지나 무릎 오므리고 앉아 울고 있는 저 아이나 ​ 누구에게나 하나의 이름은 지우지 못한 금이다 ​ 금이 간 저녁이 당신을 지난다 ​ ​ ​ ​ 김병호 시집 / 밤새 이상李箱을 읽다 ​ ​ ​ ​ ​ ​ ​

물의 감정 / 송승언

그림 / 강애란 ​ ​ ​ ​ ​ 물의 감정 / 송승언​ ​ ​ ​ 나는 물을 좋아하고 너는 물을 좋아하지 않는다 우리는 갈증으로 대립한다​ ​ 물은 너의 감정이다 너의 기분에 따라 그날의 컵이 바뀌고 물의 온도가 달라진다 ​ 태도는 항상 미온적이다 너는 웅크리고 있거나 드러누워 있다 나갔다 돌아오면 방은 침수되어 있다 너는 금붕어 두 마리를 기르고 있다 그것들은 서로 먹고, 교배하고, 낳고, 먹기를 반복한다 ​ 창은 굳게 닫혀 있다 ​ 이대로는 익사할 거라고 말한다 너는 통 듣지 않는다 벽지는 자주 바뀐다 붉었다가 푸르렀다가, 꽃잎 무늬였다가 방울 무늬가 된다 나갔다 돌아오면 방은 침수되어 있다 ​ 벽지는 젖어 있다 너처럼 물고기들은 벽의 감정을 배운다 바라보거나 바라보지 않거나 물고기는 식탁의 유리를..

저녁에 / 김광섭

그림 / 이 효 ​ ​ ​ ​ ​ ​ 저녁에 / 김광섭​ ​ ​ 저렇게 많은 별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서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 ​ ​ ​ 시집 /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명시 100선 ​ ​ ​ ​ ​​ ​ ​

우정 / 나태주

그림 / 윤혜섭 ​ ​ ​ ​ ​ ​ 우정 / 나태주​ ​ ​ ​ 고마운 일 있어도 그것은 고맙다는 말 쉽게 하지 않는 마음이란다 ​ 미안한 일 있어도 그것은 미안하다는 말 쉽게 하지 못하는 마음이란다 ​ 사랑하는 마음 있어도 그것은 사랑한다는 말 쉽게 하지 않는 마음이란다 네가 오늘 나한테 그런 것처럼. ​ ​ ​ ​ ​ ​ 시집 / 나태주 대표 시선집 ​ ​ ​ ​ ​ ​

시詩 / 노유정

작품 / 장근헌 ​ ​ ​ ​ ​ ​ 시詩 / 노유정 ​ ​ ​ ​ 막연한 그를 시詩라 말하자 ​ 때로는 발그레한 과일 같고 ​ 또는 떨떠름한 생감 같은 ​ 은밀히 숨었다가 순간에 달아나며 ​ 새벽종소리 같이 은은하게 ​ 영혼에 스며오는 그를 ​ 불멸의 고독으로 ​ 흰 눈 포근한 적막의 골짜기에도 ​ 응어리진 넋이 되어 찾아오는 그를 ​ ​ ​ ​ ​ 노유정 시집 / 피란민의 난간 ​ ​ ​ ​ ​ ​ ​ ​

아무르 / 나태주

그림 / 이종석 ​ ​ ​ ​ 아무르 / 나태주​ ​ ​ ​ ​ 새가 울고 꽃이 몇 번 더 피었다 지고 나의 일생이 기울었다 꽃이 피어나고 새가 몇 번 더 울다 그치고 그녀의 일생도 저물었다 ​ 닉네임이 흰 구름인 그녀, 그녀는 지금 어느 낯선 하늘을 흐르고 있는 건가? ​ 아무르, 아무르 강변에 꽃잎이 지는 꿈을 자주 꾼다는 그녀의 메일이 왔다 ​ 아무르, 아무르 강변에 새들이 우는 꿈을 자주 꾼다고 나도 메일을 보냈다. ​ ​ ​ ​ ​ 시집 / 나태주 대표 시선집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