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문학이야기 1390

시詩 / 노유정

작품 / 장근헌 ​ ​ ​ ​ ​ ​ 시詩 / 노유정 ​ ​ ​ ​ 막연한 그를 시詩라 말하자 ​ 때로는 발그레한 과일 같고 ​ 또는 떨떠름한 생감 같은 ​ 은밀히 숨었다가 순간에 달아나며 ​ 새벽종소리 같이 은은하게 ​ 영혼에 스며오는 그를 ​ 불멸의 고독으로 ​ 흰 눈 포근한 적막의 골짜기에도 ​ 응어리진 넋이 되어 찾아오는 그를 ​ ​ ​ ​ ​ 노유정 시집 / 피란민의 난간 ​ ​ ​ ​ ​ ​ ​ ​

아무르 / 나태주

그림 / 이종석 ​ ​ ​ ​ 아무르 / 나태주​ ​ ​ ​ ​ 새가 울고 꽃이 몇 번 더 피었다 지고 나의 일생이 기울었다 꽃이 피어나고 새가 몇 번 더 울다 그치고 그녀의 일생도 저물었다 ​ 닉네임이 흰 구름인 그녀, 그녀는 지금 어느 낯선 하늘을 흐르고 있는 건가? ​ 아무르, 아무르 강변에 꽃잎이 지는 꿈을 자주 꾼다는 그녀의 메일이 왔다 ​ 아무르, 아무르 강변에 새들이 우는 꿈을 자주 꾼다고 나도 메일을 보냈다. ​ ​ ​ ​ ​ 시집 / 나태주 대표 시선집 ​ ​ ​ ​

장미의 월경 / 이 은 수

그림 / 박인호 장미의 월경 / 이 은 수 암술과 수술의 암투 작은 것들의 반란 속에서 환청이 들려왔다 날카로운 외마디에 베어지는 붉은 꽃의 모가지 흐르는 핏빛은 유성의 기호 해독되지 않은 비밀이 덜그럭거린다 하늘의 전략이 조금은 보이다가 그냥 피로 엉겨버리고 짧은 엽서에도 없는 시간 속에 통점을 바람이 핥고 지나가면 떨어진 한 잎조차 꼿꼿한 꽃의 자세로 하늘로 스며들기 시작한다 이은수 시집 / 링크를 걸다

종암동 / 박준

그림 / 홍종구 ​ ​ ​ ​ 종암동 / 박준 ​ ​ ​ 좀처럼 외출을 하지 않는 아버지가 어느날 내 집 앞에 와 계셨다 ​ 현관에 들어선 아버지는 무슨 말을 하려다 말고 눈물부터 흘렸다 ​ 왜 우시냐고 물으니 사십 년 전 종암동 개천가에 홀로 살던 할아버지 냄새가 풍겨와 반가워서 그런다고 했다 ​ 아버지가 아버지, 하고 울었다 ​ ​ ​ ​ 박준 시집 /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 ​ ​ ​ ​ ​​ ​

​길 떠난 그대여 / 황청원

그림 / 문미란 ​ ​ ​ ​ 길 떠난 그대여 / 황청원​ ​ ​ 길 떠나는 그대여 홀로 가는 먼 길에 이름 없는 들꽃이 아무리 무성 해도 소리 내어 울지 말고 마음으로 웃고 가게 이 세상 모든 것이 어둠처럼 외로우니 길 떠나는 그대여 홀로 가는 먼 길에 고단하여 지친 마음 쉴 곳이 없다 해도 누군들 미워 말고 사랑으로 안아 주게 어차피 사는 일 빈 몸 되어 가는 거니 ​ ​ ​ ​ 시집 / 당신이 그리운 건 내게서 조금 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 ​ ​ ​​ ​

봄날은 간다 / 최금진

그림/ 손정희 ​ ​ ​ ​ ​ 봄날은 간다 / 최금진​ ​ ​ ​ 사슴 농장에 갔었네 혈색 좋은 사과나무 아래서 할아버지는 그중 튼튼한 놈을 돈 주고 샀네 순한 잇몸을 드러내며 사슴은 웃고 있었네 봄이 가고 있어요, 농장주인의 붉은 뺨은 길들여진 친절함을 연방 씰룩거리고 있었네 할아버지는 사슴의 엉덩이를 치며 흰 틀니를 번뜩 였네 내 너를 마시고 回春할 것이니 먼저 온 사람들 너덧은 빨대처럼 생긴 주둥이를 컵에 박고 한잔씩 벌겋게 들이켜고 있었네 사과나무꽃 그늘이 사람들 몸속에 옮겨 앉았네 쭉 들이켜세요, 사슴은 누워 꿈을 꾸는 듯했네 사람들 두상은 모두 말처럼 길쭉해서 어떤 악의도 없었네 누군가 입가를 문질러 닦을 때마다 꽃잎이 묻어났네, 정말 봄날이 가는 동안 뿔 잘리고 유리처럼 투명해진 사슴의 머..

한글 공부 / 박수진

그림 / Ellie's ​ ​ ​ ​ ​ ​ 한글 공부 / 박수진 ​ ​ ​ ​ 국가 유공자 자녀였다 한글을 가르쳐도 금방 잊어버리는 학생 학생 이름 한 자 한 자 조합해서 글자가 된다는 걸 가르치고 또 가르쳤다 어느날 출근을 해보니 시멘트 벽돌인 학교 담장으로 죄다 내 이름을 적어 놓았다 화분이란 화분에도 모두 내 이름이었다 나의 유명세는 그때가 최고였다 학교 통째로 내 것이 될 뻔 했다 ​ ​ ​ ​ ​ 박수진 시집 /산굼부리에서 사랑을 읽다 (특수학교 교사의 일기) ​ ​ ​ ​ ​ ​

소주병 / 공광규

​ ​ ​ ​ ​ 소주병 / 공광규 ​ ​ ​ 술병은 잔에다 자기를 계속 따라주면서 속을 비워간다 ​ 빈병은 아무렇게나 버려져 길거리나 쓰레기장에서 굴러 다닌다 ​ 바람이 세게 불던 밤 나는 문 밖에서 아버지가 흐느끼는 소리를 들었다 ​ 나가보니 마루 끝에 쪼그려 앉은 빈 소주병이었다 ​ ​ ​ ​ ​ *공광규 시인은 빈 소주병을 바라보면서 늙어서 소외된 아버지 즉 젊은 날 삶에 찌들어서 노동이 끝난 후에 소주병을 기울였을 그러나 이제는 퇴물이 되어버린 아버지를 쓸쓸하게 생각하면서 아버지와 빈 소주병을 원관념과 보조관념의 특징을 잘 살려서 만인에게 사랑받는 소주병이란 명시를 탄생시켰다. ​ ​ ​ ​

양철 지붕과 봄비 / 오규원

그림 / 최선옥 ​ ​ ​ ​ ​ 양철 지붕과 봄비 / 오규원 ​ ​ ​ 붉은 양철 지붕의 반쯤 빠진 못과 반쯤 빠질 작정을 하고 있는 못 사이 이미 벌겋게 녹슨 자리와 벌써 벌겋게 녹슬 준비를 하고 있는 자리 사이 퍼질러진 새똥과 뭉개진 새똥 사이 아침부터 지금까지 또닥 또닥 소리를 내고 있는 봄비와 또닥 또닥 소리를 내지 않고 있는 봄비 사이 ​ ​ ​ ​ 오규원 시집 / 새와 나무와 새똥 그리고 돌멩이 ​ ​ ​ ​ ​​ ​ ​

김옥희 씨 / 나호열

그림 / 김두엽 ​ ​ ​ ​ ​ 김옥희 씨 / 나호열​ ​ ​ ​ 열둘 더하기 열둘은? 이십사 팔 곱하기 팔은? 육십사 이백오십육 곱하기 이백오십육은? 아… 외웠는데 까먹었네, 생일이 언제? 구월 이십 팔일 오늘은 며칠? 그건 알아서 뭐해 그날이 그날이지 자목련 꽃진 지 이미 오래인데 ​왜 꽃이 안 피냐? 저 나무는… 아홉 시 반에 타야 하는 차를 아홉 시에 나와서 기다리는 여든여섯 살 김옥희 씨 가끔은 자기 이름도 잊어버리지만 저기 저기 주간치매보호센터 차가 오네… 불쌍한 노인네들 너무 많아 끌끌 혀를 차며 나를 잊어버리지만 ​ 오늘도 독야청청한 나의 어머니 김옥희 씨! ​ 감사합니다. 세수도 잘 하시고 이도 잘 닦으시고 화장실도 거뜬하시니 ​ 오늘도 감사합니다 ​ ​ ​ ​ ​ 나호열 시집 / 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