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문학이야기 1386

책등의 내재율 / 엄세원

그림 / 장소영 책등의 내재율 / 엄세원 까치발로 서서 책 빼내다가 몇 권이 끼우뚱 쏟아졌다 중력도 소통이라고 엎어진 책등이 시선을 붙들고 있다 반쯤 열린 창문으로 햇살이 배슥이 꽂혀와 반짝인다 정적을 가늠하며 되비추는 만화경 같은 긴 여운, 나는 잠시 일긋일긋 흔들린다 벽장에 가득 꽃힌 책제목 어딘가에 나의 감정도 배정되었을까 곁눈질하다 빠져들었던 문장을 생각한다 감각이거나 쾌락이거나 그날 기분에 따라 수십 번 읽어도 알 수 없는 나라는 책 한 권, 이 오후에 봉인된 것인지 추수르는 페이지마다 깊숙이 서려 있다 벽 이면을 온통 차지한 책등 그들만의 숨소리를 듣는다 어둠을 즐기는 안쪽 서늘한 밀착, 이즈음은 표지가 서로의 경계에서 샐기죽 기울 때 몸 안에 단어들이 압살되는 상상, 책갈피 속 한 송이 압화..

협착의 헤게모니 / 장서영

그림 / 김종수 협착의 헤게모니 / 장서영 뼈와 뼈 사이가 수상하다 경추의 1번과 5번이 밀착되고 요추에 3번과 4번이 뒤틀렸다 그래서 넓어진 건 통증, 다물어지지 않은 연속성 엉덩이는 의자와 협착하고 마감일은 나와 협착하는데 몸에 담긴 뼈와 말에 담긴 뼈가 서로 어긋나서 삐딱한 시선과 굴절된 자세를 도모한다 책상과 내가 분리되기까지 뼈가 중심이라 생각을 한 번도 못 했는데 아는지 모르는지 키보드 소리는 경쾌하고 새겨진 문장들은 마냥 과장됐다 어긋남은 순간이었다 뒤돌아보면 한쪽으로 치우친 건 언제나 나였고 오로지 솔직한 건 내 안의 그녀였다 움직이는 팔을 따라 마우스 줄을 따라 고이는 불협 예민해진 신경과 굳어진 근육 사이로 아픔이 비집고 들어와 지금 여기가 버겁게 흘러내렸다 무게 중심이 무기력 쪽으로 ..

눈 오는 날 / 이문희

그림 / 김이남 눈 오는 날 / 이문희 논밭들도 누가 더 넓은가 나누기를 멈추었다 도로들도 누가 더 긴지 재보기를 그만 두었다 예쁜 색 자랑하던 지붕들도 뽐내기를 그쳤다 모두가 욕심을 버린 하얗게 눈이 오는 날 은 시각적 이미지를 입체화한 것으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 되었던 동시다. 먼저 이 시의 공간적 이동은 논밭의 수평적 공간에서 점차 더 높은 도로 위로 이동하고 마침내 수직적 공간인 지붕으로 이동 한다. 넓이 길이 높이로 시적 공간을 입체화 하면서 눈 오는 날의 정경을 관찰자의 시점으로 조명하고 있는 점이 색다르다. *1997년 조선일보 신춘 문예 등단작입니다.

크루아상 / 윤달

© larimegale, 출처 Unsplash ​ ​ ​ 크루아상 / 윤달​ ​ ​ ​ 잠이 오지 않아서 밤을 접고, 접고, 또 접어요 아홉 겹의 어둠이 완성되면 잠시 슬퍼질 차례입니다 ​ 보이지 않는 서쪽의 지평선을 당겨서 깔고 슬퍼질 대로 슬퍼진 어둠을 눕여요 잠시 숨죽일 시간입니다 ​ 납작해진 슬픔을 조각조각 잘라서 돌돌 말아 볼까요 나는 지금 초승달을 만드는 중이에요 ​ 초승달이 뜨면 뱀파이어가 되는 당신을 위해 내 슬픔의 신선도를 지키기 위해 냉장고에 넣어 두기로 해요 ​ 아침이 올 때까지 기다립니다 당신과 다르게 아침은 어떻게든 제 시간에 찾아오니까 바람맞을 걱정 따윈 안하기로 해요 ​ 아침이 오면 밤새 숨 죽여준 비밀을 꺼내 볼 시간 이제는 발설해도 괜찮은 악몽 조금은 부풀려도 괜찮은 슬픔 ..

오늘의 날씨 -이별 주의보 / 이문희

그림 / 이종석 오늘의 날씨 -이별 주의보 / 이문희 나 오늘 활짝 펴도 되나요? 매일 죽음을 입고 벗지만 정작 우리는 죽음을 모르죠 그래서 당신과 나 사이엔 기압골의 영향으로 편서풍이 분대요 눈물은 잘 마를 거예요 나는 너무 밝은 게 탈이지만 당신은 언제나 폭풍 같죠 그래서 세상은 폭풍전야예요 그래요 밤새 벼락을 맞거나 국지성 호우에 떠내려 가기도 하겠지만 그깟 피지도 않은 꽃잎이 대수겠어요 우울의 강수량 70퍼센트 연애에 실패할 확률 99.99mm 붉은 칸나가 피었어요 나 오늘 활짝 죽어도 되나요? 시집/ 맨 뒤에 오는 사람 2021

치명적 실수 / 나태주

그림 / 김두엽 치명적 실수 / 나태주 오늘 나의 치명적 실수는 너를 다시 만나고 그만 너를 좋아해버렸다는 것이다 네 앞에서 나는 무한히 작아지고 부드러워지고 끝없이 낮아지고 끝내는 사라져버리는 그 무엇이다 네 앞에서 나는 이슬이 되고 바람이 되고 구름이 되기도 한다 보아라, 두둥실 하늘에 배를 깔고 떠가는 저기 저 흰 구름! *시집 / 나태주 대표 시선집

배웅 / 박송이

그림 / 정현영 ​ ​ ​ ​ ​ 배웅 / 박송이​ ​ ​ ​ ​ 이 세상에 없는 당신들에게 구걸하면서 헛바퀴로 돌바퀴로 구르던 시절들아 쇠창살에 갇힌 개처럼 짓다가 컹컹컹 식어가던 밥그릇들아 막 구워낸 프린터 복사지처럼 아주 잠깐 달궈졌던 몸뚱어리들아 밥 한 술 떠 먹여 주지 않던 길고 가벼운 절망들아 빠진 머리카락들아 ​ 안녕히 가세요 ​ ​ ​ ​ ​ *지성의 상상 미네르바 (2023봄호)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