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문학이야기/명시

봄날은 간다 / 최금진

푸른 언덕 2023. 6. 30. 19:05

그림/ 손정희

봄날은 간다 / 최금진

사슴 농장에 갔었네

혈색 좋은 사과나무 아래서

할아버지는 그중 튼튼한 놈을 돈 주고 샀네

순한 잇몸을 드러내며 사슴은 웃고 있었네

봄이 가고 있어요, 농장주인의 붉은 뺨은

길들여진 친절함을 연방 씰룩거리고 있었네

할아버지는 사슴의 엉덩이를 치며 흰 틀니를 번뜩 였네

내 너를 마시고 回春할 것이니

먼저 온 사람들 너덧은 빨대처럼 생긴 주둥이를

컵에 박고 한잔씩 벌겋게 들이켜고 있었네

사과나무꽃 그늘이 사람들 몸속에 옮겨 앉았네

쭉 들이켜세요, 사슴은 누워 꿈을 꾸는 듯했네

사람들 두상은 모두 말처럼 길쭉해서 어떤 악의도 없었네

누군가 입가를 문질러 닦을 때마다

꽃잎이 묻어났네, 정말 봄날이 가는 동안

뿔 잘리고 유리처럼 투명해진

사슴의 머리통에 사과나무 가지들이 대신 걸리고

할아버지 얼굴은 통통하게 피가 올라 출렁거려었네

늙은 돼지 몇마리를 몰고 나와 배웅하는 농장 주인과

순록떼처럼 킁킁 웃으며 돌아가는 사람들 뒤

사과꽃잎에 빗물자국 번지며 봄날이 가고 있었네

최금진 시집 / 새들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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