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문학이야기/명시 966

그래서 그랬다 / 임솔아

그림 / 안호범 ​ ​ ​ ​ 그래서 그랬다 / 임솔아 ​ ​ 살구꽃은 무섭다. 하루 아침에 새까매진다. 가로등 아래서 살점처럼 시뻘겠는데. 살아가는 것이 죽어가는 것보다 무섭다. 유리컵 속에 가둔 말벌이 죽지는 않고 죽어만 간다. ​ 잠그지 않은 가스밸브처럼 가만히 누워 있는 내가 무섭다. 아무도 없어서 무섭고 누군가 있을까 봐 더 무섭다. ​ 엄마한테 할 말 없니 엄마의 그 말이 내 말문을 닫는다. ​ 할 말이 없어서 무섭고 할 말이 생길까 봐 더 무섭다. ​ 나도 모르게 울음이 터질 때와 같이 무서웠던 것들이 시원하게 풀려나간다. 눈물도 안 나던 순간에 눈물이 갑자기 끝나는 순간에 무섭다는 말이 무색해지는 순간에 한 번도 믿어보질 못해서 쉽게 믿어버릴까 봐서 ​ 술 취한 친구의 눈빛과 술 안 취한 ..

장님 / 문태준

그림 / 손 영 숙 ​ ​ ​ ​ 장님 / 문태준 ​ ​ ​ 찔레나무에 찔레꽃이 피었습니다 그 곁에 오금이 저리도록 앉아 있었습니다 하나의 의혹이 생겼습니다 그대의 가슴은 어디에 있습니까 찔레 덤블 속 같은 곳 헝클어진 곳보다 보다 안쪽 막 눈물이 돌기 시작하는 곳 그곳으로 날아오는 새와 날아오는 구름 그곳으로부터 날아가는 새와 날아가는 구름 ​ ​ ​ 문태준 시집 / 그늘의 발달(2008) ​ ​ ​

생명보험 / 김기택

그림 / 윤지원 ​ ​ ​ 생명보험 / 김기택 ​ ​ ​ 병원마다 장례식장마다 남아도는 죽음, 밥 먹을 때마다 씹히고 이빨 사이에 고집스럽게 끼어 양치질해도 빠지지 않는 죽음이 오늘 밤은 형광등에 다투어 몰려들더니 바닥에 새카맣게 흩어져 있다. ​ 삶은 언젠가 나에게도 죽음 하나를 주리라. 무엇이든 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 내 두 손은 공짜이므로 넙죽 받을 것이다. 무엇이든 손에 들어오는 것은 일단 움켜쥐고 볼 일이다. 걱정은 나중에 해도 된다. ​ 그렇잖아도 죽음에 투자하라고 부동산 투자보다 훨씬 안전하고 수익도 높다고 투자만 해놓으면 다리 쭉 펴고 맘 놓고 죽을 수 있다고 보험설계사가 솔깃한 제안을 해왔다 ​ 죽음에는 다리들이 참 많이 달려 있다. 이젠 길이 땅에서 하늘로 바뀌었다는 듯 하나같이 다리들..

고래가 일어서다 / 김은수​

그림 / 조근영 ​ ​ ​ ​ 고래가 일어서다 / 김은수 ​ ​ ​ 일상이 싱거워졌다. ​ ​ 바람 부는 날 바다는 고래가 된다 태풍이 불면 힘차게 일어서는 고래 ​ ​ 수평선 넘어 잊었던 기억 등에 지고 성큼 다가서는 맷집에 모래사장 오줌을 지리고 있다 ​ ​ 고래가 날 세워 호통친다 바람을 맞잡고 일어서는 거품둘 헤진 옷깃 깊숙이 젖어든다 ​ ​ 순간 짠맛에 길들여진 고래 뱃속에서 일상이 속속 숨죽이며 벌떡 일어섰다. ​ ​ ​ ​ 시집 / 인사동 시인들 (14호) ​ ​ ​ ​ ​

바다의 오후 / 이 생 진

그림 / 이 형 미 ​ ​ ​ ​ 바다의 오후 / 이 생 진 ​ ​ ​ ​ 바다는 마을 아이들의 손을 잡고 한나절을 정신없이 놀았다 아이들이 손을 놓고 돌아간 뒤 바다는 멍하니 마을을 보고 있었다 마을엔 빨래가 마르고 빈 집 개는 하품이 잦았다 밀감나무엔 게으른 윤기가 흐르고 저기 여인과 함께 탄 버스엔 덜컹덜컹 세월이 흘렀다 ​ ​ ​ ​ 시집 / 그리운 바다 성산포​ ​ ​ ​ ​ ​ ​

괜찮다 새여 / 양 광 모

그림 / 안 호 범 ​ ​ ​ ​ ​ 괜찮다 새여 / 양 광 모 ​ ​ ​ 새우깡 하나 차지하겠다고 대부도 방아머리 선착장에서 자월도까지 쫒아 날아오던 갈매기 한 마리와 눈이 마주쳤는데 어쩐지 못 볼 것을 본 듯한 마음에 먼저 눈길을 피하고 말았다 필경 저 새도 땅에 내려앉는 것이 부끄러워 발목이 붉어졌을 것이다 밤이면 자줏빛 달을 부리에 물고 파랑 같은 울음을 울겠다마는 괜찮다 새여, 하늘을 날기 위해서는 먼저 물 위에 떠있는 법을 배워야 한다 ​ ​ ​ ​ 양광모 시집 / 가끔 흔들렸지만 늘 붉었다 ​ ​ ​ ​ ​ 그림 / 김 종 정

풍경의 해부 / 조 용 미

그림 / 김 세 환 ​ ​ ​ ​ ​ 풍경의 해부 / 조 용 미 ​ ​ ​ ​ 저렇게 많은 풍경이 너를 거쳤다 저렇게 많은 풍경의 독이 네 몸에 중금속처럼 쌓여 있다 올리브나무 사이 강렬한 태앙은 언제나 너의 것, 너는 올리브나무 언덕을 지나갔다 양귀비들은 그 아래 붉게 흐드러져 있다 바다에 둥지를 틀고 알을 낳는 알시옹처럼 너는 운명을 다스리는 힘을 가졌다 이곳의 햇빛은 죄악을 부추긴다 나는 비로서 알게 되었다 이 불가해한 세계가 바로 너라는 것을 ​ ​ ​ 조용미 시집 / 기억의 해성 ​ ​ ​ ​ ​

해마다 봄이 되면 / 조병화

그림 / 안호범 ​ ​ ​ ​ ​ 해마다 봄이 되면 / 조병화 ​ ​ ​ 해마다 봄이 되면 어린 시절 그분의 말씀 항상 봄처럼 부지런해라 땅 속에서, 땅 위에서 공중에서 생명을 만드는 쉬임 없는 작업 지금 내가 어린 벗에게 다시 하는 말이 항상 봄처럼 부지런해라 ​ 해마다 봄이 되면 어린 시절 그분의 말씀 항상 봄처럼 꿈을 지녀라 보이는 곳에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생명을 생명답게 키우는 꿈 봄은 피어나는 가슴 지금 내가 어린 벗에게 다시 하는 말이 항상 봄처럼 꿈을 지녀라 오, 해마다 봄이 되면 어린 시절 그 분의 말씀 항상 봄처럼 새로워라 나뭇가지에서 물 위에서 뚝에서 솟는 대지의 눈 지금 내가 어린 벗에게 다시 하는 말이 항상 봄처럼 새로워라 ​ ​ ​ ​ ​ 시집 / 시가 나에게 살라고 한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