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문학이야기/명시 966

저녁의 염전 / 김 경 주

그림 / 전 지 숙 ​ ​ ​ ​ 저녁의 염전 / 김 경 주 ​ ​ ​ ​ 죽은 사람을 물가로 질질 끌고 가듯이 염전의 어둠은 온다 섬의 그늘들이 바람에 실려 온다 물 안에 스며 있는 물고기들, 흰 눈이 수면에 번지고 있다 폐선의 유리창으로 비치는 물속의 어둠 선실 바닥엔 어린 갈매기들이 웅크렸던 얼룩, 비늘들을 벗고 있는 물의 저녁이 있다 멀리 상갓집 밤불에 구름이 쇄골을 비친다 밀물이 번지는 염전을 보러 오는 눈들은 저녁에 하얗게 증발한다 다친 말에 돌을 놓아 물속에 가라앉히고 온 사람처럼 여기서 화폭이 퍼지고 저 바람이 그려졌으리라 희디힌 물소리, 죽은 자들의 언어 같은, 빛도 닿지 않는 바다 속을 그 소리의 영혼이라 부르면 안되나 노을이 물을 건너가는 것이 아니라 노을 속으로 물이 건너가는 것이다..

등에 관하여 푼다 / 박 순

그림 / 최 종 태 ​ ​ ​ ​ ​ 등에 관하여 푼다 / 박 순 ​ ​ ​ ​ 꺾인 허리 반쯤 펴고 들어 올린 들통 엿질금을 물에 담가 불리고 팍팍 문질러 꼬두밥 넣고 불앞에서 밤을 지새운 엄마 밥알이 껍질만 남긴 채 쏙 빠져나오듯 세상에서 젤루 어려운 것이 넘의 맴 얻는 거라며 투닥대지 말고 비위 맞춰 살라고 맴 단단히 붙들고 강단지게 살라고 했다 어여 가거라, 와이퍼처럼 손을 흔들던 겨울비 우산 속 키 작은 엄마는 어둠속으로 묻혀갔다 어매, 어쩌다가 꼬두밥이 되야 불었소 ​ ​ ​ ​ 시집 / 시작 : 시시한 일상이 작품이 될 거야 (출저 : 도봉문화원) ​ ​ ​ ​ ​

천관 (天冠) / 이대흠

그림 / 신미현 ​ ​ ​ 천관 (天冠) / 이대흠 ​ ​ ​ 강으로 간 새들이 강을 물고 돌아오는 저물녘에 차를 마신다 ​ ​ 막 돋아난 개밥바라기를 보며 별의 뒤편 그늘을 생각하는 동안 ​ ​ 노을은 바위에 들고 바위는 노을을 새긴다 ​ ​ 오랜만에 바위와 놀빛처럼 마주 앉은 그대와 나는 말이 없고 ​ ​ 먼 데 갔다 온 새들이 어둠에 덧칠된다 ​ ​ 참 멀리 갔구나 싶어도 거기 있고 ​ ​ 참 멀리 왔구나 싶어도 여기 있다 ​ ​ ​ ​ ​ *전라남도 장흥에 천관산이 있다. 봉우리와 기암 괴석이 솟아오른 모양이 "면류관"과도 같다고 해서 천관산이라는 이름이 생겼다. ​ ​ ​ 문태준 시집 / 시가 너에게 해답을 가져다 줄 것이다 ​ ​ ​ ​ ​ ​

새들은 지붕을 짓지 않는다 / 정호승

그림 / 서순태 ​ ​ ​ 새들은 지붕을 짓지 않는다 / 정호승 ​ ​ 새들은 지붕을 짓지 않는다 잠이 든 채로 그대로 눈을 맞기 위하여 잠이 들었다가도 별들을 바라보기 위하여 외롭게 떨어지는 별똥별을 위하여 그 별똥별을 들여다보고 싶어하는 어린 나뭇가지들을 위하여 ​ ​ 새들은 지붕을 짓지 않는다 가끔 외로운 낮 달도 쉬어가게 하고 가끔 민들레 홀씨도 쉬어가게 하고 가끔 인간을 위하여 우시는 하나님의 눈물을 받아둔다 ​ ​ 누구든지 아침에 일찍 일어나 새들의 집을 한번 들여다보라 간밤에 떨어진 별똥별들이 고단하게 코를 골며 자고 있다 간밤에 흘리신 하느님의 눈물이 새들의 깃털에 고요히 이슬처럼 맺혀있다 ​ ​ ​ ​ 정호승 시집 /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 ​ ​ ​ ​ ​ ​

깊은 숲 / 강윤후

그림 / 권 선 희 ​ ​ ​ ​ ​ 깊은 숲 / 강윤후 ​ ​ ​ 나무들이 울창한 생각 끝에 어두워진다 김 서린 거울을 닦듯 나는 손으로 나뭇가지를 걷으며 나아간다 깊이 들어갈수록 숲은 등을 내보이며 ​ 멀어지기만 한다 저 너머에 내가 길을 잃고서야 닿을 수 있는 집이라도 한 채 숨어 있다는 말인가 문 열면 바다로 통하는 집을 저 숲은 품에 안고 성큼 성큼 앞서 가는 것인가 마른 잎이 힘 다한 바람을 슬며시 ​ 내려놓는다 길 잃은 마음이 숲에 들어 더 깊은 숲을 본다 ​ ​ ​ ​ 시집 / 다시 쓸쓸한 날에 ​ ​ ​ ​

재활 병원 / 정경화(2022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조부문 당선작)​

작품 / 고 민 숙 ​ ​ ​ ​ ​ 재활 병원 / 정경화 (2022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조부문 당선작) ​ ​ ​ ​ 바장이던 시간들이 마침내 몸 부린다 한 평 남짓 시계방에 분해되는 작은 우주 ​ ​ 숨 가삐 걸어온 길이 하나 둘씩 드러난다 ​ ​ 시작과 끝 어디인지 알 수 없는 하늘처럼 종종걸음 맞물리는 톱니바퀴 세월 따라 ​ ​ 녹슬고 닳아진 관절 그 앙금을 닦는다 ​ ​ 조이고 또 기름 치면 녹슨 날도 빛이 날까 눈금 위 도돌이표 삐걱거리는 시간 위로 ​ ​ 목 붉은 초침소리를 째깍째깍 토해낸다 ​ ​ ​ ​ ​ *1963년 전남 담양 출생 *호남대 대학원 한국어교육학과 졸업 *호남대 언어 교육원 강사 ​ ​ ​ ​ ​ ​

럭키슈퍼 / 고선경(2022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그림 / 이 민 지 ​ ​ ​ 럭키슈퍼 / 고선경 (2022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 ​ ​ ​ 농담은 껍질째 먹는 과일입니다 전봇대 아래 버려진 홍시를 까마귀가 쪼아 먹네요 ​ 나는 럭키슈퍼 평상에 앉아 풍선껌 씹으면서 나뭇가지에 맺힌 열매를 세어 보는데요 원래 낙과가 맛있습니다 ​ 사과 한 알에도 세계가 있겠지요 풍선껌을 세계만큼 크게 불어 봅니다 그러다 터지면 서둘러 입속에 훔쳐 넣습니다 세계의 단물이 거의 다 빠졌어요 ​ 슈퍼 사장님 딸은 중학교 동창이고 서울에서 대기업에 다닙니다 대기업 맛은 저도 좀 아는데요 우리 집도 그 회사가 만든 감미료를 씁니다 ​ 대기업은 농담 맛을 좀 압니까? 농담은 슈퍼에서도 팔지 않습니다 ​ 여름이 다시 오면 자두를 먹고 자두 씨를 심을 거예요 나는 껍질째..

바람의 말 / 마종기

그림 / 원 효 준 ​ ​ ​ ​ ​ 바람의 말 / 마종기 ​ ​ ​ 우리가 모두 떠난 뒤 내 영혼이 당신 옆을 스치면 설마라도 봄 나뭇가지 흔드는 바람이라고 생각하지는 마. ​ ​ 나 오늘 그대 알았던 땅 그림자 한 모서리에 꽃나무 하나 심어 놓으려니 그 나무 자라서 꽃 피우면 우리가 알아서 얻는 모든 괴로움이 꽃잎 되어서 날아가 버릴 거야. ​ ​ 꽃잎 되어서 날아가 버린다. 참을 수 없게 아득하고 헛된 일이지만 어쩌면 세상 모든 일을 지척의 자로만 재고 살 건가. ​ ​ 가끔 바람 부는 쪽으로 귀 기울이면 착한 당신, 피곤해져도 잊지 마, 아득하게 멀리서 오는 바람의 말을. ​ ​ ​ ​ 시집 / 어느 가슴엔들 시가 꽃피지 않으랴 ​ ​ ​ *마종기 시인은 동화작가 마해송과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서..

경유지에서 / 채윤희 (202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작품 / 윤 경 주 ​ ​ ​ 경유지에서 / 채윤희 (202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 ​ ​ 중국 부채를 유럽 박물관에서 본다 초록색을 좋아하는 나는 딱정벌레 날개 위에 누워 있다 ​ 한때 공작부인의 소유였다는 황금색 부채 예수는 얼핏 부처의 형상을 하고 있다 약속한 땅은 그림 한 뼘 물가로 사람을 인도한다는 뿔 달린 짐승은 없다 ​ 한 끝이 접혔다가 다시 펼쳐진다 떨어진 금박은 지난 세기 속에 고여 있고 사탕껍질이 바스락거린다 잇새로 빠져나와서 바닥으로 떨어지는 받아 적을 수 없는 소리 ​ 파란색을 좋아하는 나는 물총새 깃털을 덮고 잠든다 멸종에 임박한 이유는 오직 아름답기 때문 핀셋이 나를 들어올리고 길이 든 가위가 살을 북, 찢으며 들어간다 ​ 기원에 대한 해설은 유추 가능한 외국어로 ..

꽃을 더듬어 읽다 / 김성애

그림 / 이 연 숙 ​ ​ ​ ​ 꽃을 더듬어 읽다 / 김성애 (202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 ​ ​ 리어카와 한 몸으로 꾸뻑이는 할머니 먼 길 걸어오셨나, 가슴이 흘러 내린다 바람은 소리를 접어 산속으로 떠나고 비 맞아 꿉꿉해진 골목들의 이력같이 소나무 우듬지에 걸려있는 저 흰구름 공중의 새를 날려서 주름살 지워낸다 색 바랜 기억들이 토해놓은 노을인가 중복지난 서녘에 붉은 섬 둥둥 띄워 초저녁 봉선화처럼 왔던 길을 되묻고 ​ ​ ​ ​ 꽃을 더듬어 읽다 / 김성애 (2022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