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문학이야기/명시 966

원룸 / 김 소 연

그림 / 임 노 식 ​ ​ ​ ​ 원룸 / 김 소 연 ​ ​ ​ 창문을 열어두면 앞집 가게 옥외 스피커에서 음악이 흘러나온다 내 방까지 닿는다 ​ 주워 온 돌멩이에서 한 마을의 지도를 읽는다 밑줄 긋지 않고 한 권 책을 통과한다 ​ 너무 많은 생각에 가만히 골몰하면 누군가의 이야기를 엿듣는 느낌이 온다 ​ 꿈이 끝나야 슬그머니 잠에서 빠져나오는 날들 꿈과 생의 틈새에 누워 미워하던 것들에게 미안해하고 있다 ​ 이야기는 그렇게 내 곁에 왔고 내 곁을 떠나간다 ​ 가만히 있기만 하여도 용서가 구름처럼 흘러간다 내일의 날씨가 되어간다 빈방에 옥수수처럼 누워서 ​ ​ ​ ​ ​ 김소연 시집 / 수학자의 아침 ​ ​ ​ ​

또 기다리는 편지 / 정 호 승

그림 / 최 수 란 또 기다리는 편지 / 정 호 승 지는 저녁 해를 바라보며 오늘도 그대를 사랑하였습니다 날 저문 하늘에 별들은 보이지 않고 잠든 세상 밖으로 새벽달 빈 길에 뜨면 사랑과 어둠의 바닷가에 나가 저무는 섬 하나 떠올리며 울었습니다 외로운 사람들은 어디론가 사라져서 해마다 첫눈으로 내리고 새벽보다 깊은 새벽 섬기슭에 앉아 오늘도 그대로 사랑하는 일보다 기다리는 일이 더 행복하였습니다 정호승 시집 / 너를 사랑해서 미안하다

도플갱어 / 김 이 듬

그림 / 김 정 수 ​ ​ ​ ​ ​ 도플갱어 / 김 이 듬 ​ ​ ​ ​ 나는 투표소에 가는 사람 주민등록증 가지러 도로 와서는 안 나가는 사람 내가 믿는 바를 스스로 믿지 못하는 사람 나는 검은 코트를 입고 휴대전화로 통화하는 사람 거침없이 말하며 후회하기를 타고난 사람 나는 슬리퍼 끌고 편의점에서 술을 사는 한밤중 바코드의 사람 나는 도로 위에 흰 스프레이 페인트로 그려진 사람 빈둥거리며 지척에 흩날리는 나 꿈에 늑대를 타고 달리지만 대부분 걸어 다니는 사람 음악이 없으면 금방 다리가 아픈 사람 죽느냐 사느냐 고뇌하는 사람들의 성장기를 거치지 않고 죽일 것인가 살릴 것인가 망설임조차 결여된 사람 정부는 출산여성에게 인센티브를 준다는데, 그깟 놈들 말 듣지 않는 사람 나는 콩나물해장국을 마구 퍼먹는 ..

뼈아픈 후회 / 황지우

그림 / 강 정 옥 ​ ​ ​ ​ ​ 뼈아픈 후회 / 황지우 ​ ​ ​ ​ 슬프다 ​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 ​ 모두 폐허다 ​ 완전히 망가지면서 완전히 망가뜨려놓고 가는 것; 그 징표 없이는 진실로 사랑했다 말할 수 없는 건지 나에게 왔던 사람들, 어딘가 몇 군데는 부서진 채 모두 떠났다 ​ 내 가슴속엔 언젠나 부우옇게 이동하는 사막 신전; 바람의 기둥이 세운 내실에까지 모래가 몰려와 있고 뿌리째 굴러가고 있는 갈퀴나무, 그리고 말라가는 죽은 짐승 귀에 모래 서걱거린다 ​ 어떤 연애로도 어떤 광기로도 이 무시무시한 곳에까지 함께 들어오지는 못했다, 내 꿈틀거리는 사막이, 끝내 자아를 버리지 못하는 그 고열의 신상이 벌겋게 달아올라 신음했으므로 내 사랑의 자리는 모두 폐허가 되어 있다 ​ 아무도 사랑해본..

밤, 바람 속으로 / 나 희 덕

작품 / 김 광 호 ​ ​ ​ ​ 밤, 바람 속으로 / 나 희 덕 ​ ​ ​ ​ 아버지 저를 업었지요. 별들이 멀리서만 반짝이던 밤 저는 눈을 뜬 듯 감은 듯 꿈도 깨지 않고 등에 업혀 이 세상 건너갔지요. 차마 눈에 넣을 수 없어서 꼭꼭 씹어 삼킬 수도 없어서 아버지 저를 업었지요. 논둑길 뱀딸기 밑에 자라던 어린 바람도 우릴 따라왔지요 어떤 행위로도 다할 수 없는 마음의 표현 업어준다는 것 내 생의 무게를 누군가 견디고 있다는 것 그것이 긴 들판 건너게 했지요. 그만 두 손 내리고 싶은 세상마저 내리고 싶은 밤에도 저를 남아 있게 했지요. 저는 자라 또 누구에게 업혔던가요. 바람이 저를 업었지요. 업다가 자주 넘어져 일어나지 못했지요. ​ ​ ​ ​

밤 눈 / 기 형 도

그림 / 소 순 희 ​ ​ ​ ​ 밤 눈 / 기 형 도 ​ ​ ​ ​ 네 속을 열면 몇 번이나 얼었다 녹으면서 바람이 불 때마다 또 다른 몸짓으로 자리를 바꾸던 은실들이 엉켜 울고 있어. 땅에는 얼음 속에서 썩은 가지들이 실눈을 뜨고 엎드려 있었어. 아무에게도 줄 수 없는 빛을 한 점씩 하늘 낮게 박으면서 너는 무슨 색깔로 또 다른 사랑을 꿈꾸었을까. 아무도 너의 영혼에 옷을 입히지 않던 사납고 고요한 밤, 얼어붙은 대지에는 무엇이 남아 너의 춤을 자꾸만 허공으로 띄우고 있었을까. 하늘에는 온통 네가 지난 자리마다 바람이 불고 있다. 아아, 사시나무 그림자 가득찬 세상, 그 끝에 첫발을 디디고 죽음도 다가서지 못하는 온도로 또 다른 하늘을 너는 돌고 있어. 네 속을 열면. ​ ​ ​ ​ ​ 기형도 시집 ..

애인은 토막 난 순대처럼 운다 ​/ 권혁웅

그림 / 영 희 ​ ​ ​ ​ 애인은 토막 난 순대처럼 운다 ​/ 권혁웅 ​ ​ ​ ​ 지금 애인의 울음은 변비 비슷해서 두 시간째 끊겼다 이어졌다 한다 몸 안을 지나는 긴 울음통이 토막 나 있다 신의주 찹쌀순대 2층, 순댓국을 앞에 두고 애인의 눈물은 간을 맞추고 있다 그는 눌린 머리고기처럼 얼굴을 눌러 눈물을 짜낸다 새우젓이 짜부라든 그의 눈을 흉내 낸다 나는 당면처럼 미끄럽게 지나간 시간의 다발을 생각하고 마음이 선지처럼 붉어진다 다 잘게 썰린 옛날 일이다 연애의 길고 구부정한 구절양장을 지나는 동안 우리는 빨래판에 치댄 표정이 되었지 융털 촘촘한 세월이었다고 하기엔 뭔가가 빠져 있다 지금 마늘과 깍두기만 먹고 견딘다 해도 동굴 같은 내장 같은 애인의 목구멍을 다시 채워줄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버..

비망록 / 문 정 희

그림 / 송 영 신 ​ ​ ​ ​ 비망록 / 문 정 희 ​ ​ ​ 남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싶은데 남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 ​ 가난한 식사 앞에서 기도를 하고 밤이면 고요히 일기를 쓰고 싶은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구겨진 속옷을 내보이듯 매양 허물만 내보이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 ​ 사랑하는 사람아 너는 내 가슴에 아직도 눈에 익은 별처럼 박혀 있고 ​ ​ 나는 박힌 별이 돌처럼 아파서 이렇게 한 생애를 허둥거린다. ​ ​ ​ ​ 시집 / 시가 나에게 살라고 한다. ​ ​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