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전문 앞에서 / 안 재 홍 그림 / 정 진 경 회전문 앞에서 / 안 재 홍 꽃잎 하나 하늘거리며 떨어져 내린다 저 가뿐한 몸짓 회전문 앞에서 본다 나가고자 하나 다시 돌아온 제자리가 진정한 자유인지 모른다 내 안에 안녕이 있음을 떠나본 자들은 알리라 안에서 나가려 하고 밖에서 들어오려 애쓴다 안팎의 경계가 꽃그늘처럼 아슴아슴하다 안재홍 시집 / 무게에 대하여 문학이야기/명시 2021.11.25
오래된 가을 / 천 양 희 그림 / 한 정 림 오래된 가을 / 천 양 희 돌 아오지 않기 위해 혼자 떠나 본 적이 있는가 새벽 강에 나가 홀로 울어 본 적이 있는가 늦은 것이 있다고 후회해 본 적이 있는가 한 잎 낙엽같이 버림받은 기분에 젖은 적이 있는가 바람 속에 오래 서 있어 본 적이 있는가 한 사람을 나보다 더 사랑한 적이 있는가 증오보다 사랑이 조금 더 아프다고 말한 적이 있는가 그런 날이 있는가 가을은 눈으로 보지 않고 마음으로 보는 것 보라 추억을 통해 우리는 지나간다. 출생 / 1942년 1월 21일 , 부산 학력 / 이화여자대학교, 국문과 졸업 데뷔 / 1965년 현대문학 '정원 한때' 등단 수상 / 2017.10. 통영문학상 시상식 청마문학상 문학이야기/명시 2021.11.24
텅 빈 자유 (치매행 致梅行) / 홍 해 리 그림 / 강 은 영 텅 빈 자유 (치매행 致梅行) 홍해리 아내는 신문을 읽을 줄 모릅니다 텔레비전을 켜고 끄는 것도 못합니다 전화를 걸 줄도 모릅니다 컴퓨터는 더군다나 관심도 없습니다 돈이 무엇인지 모르는데 돈이 어디에 필요하겠습니까 은행이 무엇인지 모르니 은행에 갈 일도 없습니다 통장도 신용카드도 쓸 줄 모르니 버려야 합니다 버스카드도 필요가 없습니다 문명의 이기가 정말 이기이긴 한 것인가 요즘은 헷갈리기만 합니다 이름을 몰라도 칼은 칼이고 사과는 사과입니다 자유라는 말은 몰라도 아내는 자유인입니다 지는 해가 절름절름 넘어가고 있습니다. 홍해리 시집 / 치매행 致梅行 문학이야기/명시 2021.11.23
깊은 숲 / 강 윤 후 그림 / 강 은 영 깊은 숲 / 강 윤 후 나무들이 울창한 생각 끝에 어두워진다 김 서린 거울을 닦듯 나는 손으로 나뭇가지를 걷으며 나아간다 깊이 들어갈수록 숲은 등을 내보이며 멀어지기만 한다 저 너머에 내가 길을 잃고서야 닿을 수 있는 집이라도 한 채 숨어 있다는 말인가 문 열면 바다로 통하는 집을 저 숲은 품에 안고 성큼 성큼 앞서 가는 것인가 마른 잎이 힘 다한 바람을 슬며시 내려놓는다 길 잃은 마음이 숲에 들어 더 깊은 숲을 본다 *출생 : 1962, 서울 *학력 : 고려대학교 대학원 *경력 : 우송공업대학 (문예창작과조교수) 문학이야기/명시 2021.11.22
어떤 出土 / 나 희 덕 그림 / 김 소 영 어떤 出土 / 나 희 덕 고추밭을 걷어내다가 그늘에서 늙은 호박 하나를 발견했다 뜻밖의 수확을 들어올리는데 흙 속에 처박힌 달디단 그녀의 젖을 온갖 벌레들이 오글오글 빨고 있는 게 아닌가 소신공양을 위해 타닥타닥 타고 있는 불꽃 같기도 했다 그 은밀한 의식을 훔쳐보다가 나는 말라가는 고춧대를 덮어주고 돌아왔다 가을갈이를 하려고 밭에 다시 가보니 호박은 온데간데 없다 불꽃도 흙 속에 잦아든 지 오래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녀는 젖을 다 비우고 잘 마른 종잇장처럼 땅에 엎드려 있는 게 아닌가 스스로의 죽음을 덮고 있는 관뚜껑을 나는 조심스럽게 들어올렸다 한 웅큼 남아 있는 둥근 사리들! 나희덕 시집 / 사라진 손바닥 문학이야기/명시 2021.11.21
세상이 밝았다 / 나호열 그림 / 김 정 수 세상이 밝았다 / 나호열 내가 떠나온 곳을 향하여 미친 듯이 되돌아가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등진 곳을 향하여 허기진 채로 되돌아가는 나 이 거대한 허물 속에 껍데기 속에 우리는 무정란의 꿈을 낳는다 나란히 눕자 꿈은 잠들지 않으면 찾아오지 않는다 나란히 누워 죽은 듯이 잠들자 잠들 듯이 죽어버리자 우리는 날카로운 비명을 듣는다 유리창 깨지는 소리를 무엇인가가 뛰쳐나오는 황급한 발자국 소리를 세상이 밝았다고 표현한다 허물분인 껍데기분인 세상에 꿈은 깨지기 위해 무섭게 꽃을 피운다 문학이야기/명시 2021.11.20
소풍 / 나 희 덕 그림 / 김 한 솔 소풍 / 나 희 덕 얘들아, 소풍 가자. 해지는 들판으로 나가 넓은 바위에 상을 차리자꾸나. 붉은 노을에 밥 말아먹고 빈 밥그릇 속에 별도 달도 놀러 오게 하자. 살면서 잊지 못할 몇 개의 밥상을 받았던 내가 이제는 그런 밥상을 너희에게 차려줄 때가 되었나 보다. 가자, 얘들아, 어서 저 들판으로 가자. 오갈 데 없이 서러운 마음은 정육점에 들러 고기 한 근을 사고 그걸 싸서 입에 넣어 줄 채소도 뜯어왔단다. 한 잎 한 잎 뜯을 때마다 비명처럼 흰 진액이 배어 나왔지. 그리고 이 포도주가 왜 이리 붉은지 아니? 그건 대지가 흘린 땀으로 바닷물이 짠 것처럼 엄마가 흘린 피를 한 방울씩 모은 거란다. 그러니 얘들아, 꼭꼭 씹어 삼켜라. 그게 엄마의 안창살이라는 걸 몰라도.. 문학이야기/명시 2021.11.19
상사화 / 홍해리 그림 / 김 정 수 상사화 / 홍해리 내가 마음을 비워 네게로 가듯 너도 몸 버리고 마음만으로 내게로 오라 너는 내 자리를 비우고 나는 네 자리를 채우지 오명 가명 만나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가는 길이 하나이기 때문 마음의 끝이 지고 산 그늘 강물에 잠기우듯 그리움은 넘쳐넘쳐 길을 끊나니 저문저문 저무는 강가에서 보라 저 물이 울며 가는곳 멀고 먼 지름길 따라 골비한 영혼 하나 낯설게 떠도는 것을 문학이야기/명시 2021.11.18
어머니는 수국화였다 / 권 정 일 그림 / 이 효 어머니는 수국화였다 / 권 정 일 그때 나는 세모시 저고리에서 달빛보다 더 선연한 바늘의 등뼈가 휘어지는 것을 보았다. 열 손가락 관절이 삐걱이는 소리를 들었다. 수묵화처럼 가지런한 이마가 환한 빛을 내던 토방 쪽마루를 보았다. 어머니 반짇고리 곁에는 내가 이름 지어준 별들이 내려와 집을 짓곤 했다. 못에 찔려 피 흘리던 내 꿈들 우리집 추녀 끝에 밤마다 찾아드는 바닷소리를 들었다. 한 채 섬이 된 우리집 마당으로 물방울처럼 별 하나 별 둘 똑똑 떨어지는 기척이 있었다. 옛날 이야기가 섬이 되어 떠다니고 푸른 슬레트 지붕이 녹스는 소리마저 정겨운 여름밤이었다. 흑싸리 화투패 같은 빈 껍질의 어머니 가슴에서도 녹스는 소리가 들렸다. 어쩜 그것은.. 문학이야기/명시 2021.11.17
아무도 등장하지 않는 이 거울이 마음에 든다 (문화일보 2021 신춘문예 시) / 남수우 그림 / 톰 안홀트 아무도 등장하지 않는 이 거울이 마음에 든다 (문화일보 2021 신춘문예 시) / 남수우 한 사람에게 가장 먼 곳은 자신의 뒷모습이었네 그는 그 먼 곳을 안으러 간다고 했다 절뚝이며 그가 사라진 거울 속에서 내가 방을 돌보는 동안 거실의 소란이 문틈을 흔든다 본드로 붙여둔 유리잔 손잡이처럼 들킬까 봐 자꾸만 귀가 자랐다 문밖이 가둔 이불 속에서 나는 한쪽 다리로 풍경을 옮기는 사람을 본다 이곳이 아니길 이곳이 아닌 나머지이길 중얼거릴수록 그가 흐릿해졌다 이마를 기억한 손이 거울 끝까지 굴러가 있었다 거실의 빛이 문틈을 가를 때 그는 이 방을 겨눌 것이다 번쩍이는 총구를 지구 끝까지 늘리며 제 뒤통수를 겨냥한다 해도 누구의 탓은 아니지 .. 문학이야기/명시 2021.1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