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문학이야기/명시

어떤 出土 / 나 희 덕

푸른 언덕 2021. 11. 21. 18:18

그림 / 김 소 영

 

어떤 出土 / 나 희 덕

고추밭을 걷어내다가

그늘에서 늙은 호박 하나를 발견했다

뜻밖의 수확을 들어올리는데

흙 속에 처박힌 달디단 그녀의 젖을

온갖 벌레들이 오글오글 빨고 있는 게 아닌가

소신공양을 위해

타닥타닥 타고 있는 불꽃 같기도 했다

그 은밀한 의식을 훔쳐보다가

나는 말라가는 고춧대를 덮어주고 돌아왔다

가을갈이를 하려고 밭에 다시 가보니

호박은 온데간데 없다

불꽃도 흙 속에 잦아든 지 오래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녀는 젖을 다 비우고

잘 마른 종잇장처럼 땅에 엎드려 있는 게 아닌가

스스로의 죽음을 덮고 있는

관뚜껑을 나는 조심스럽게 들어올렸다

한 웅큼 남아 있는 둥근 사리들!

 

나희덕 시집 / 사라진 손바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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