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국화 / 천 상 병 그림 / 김 정 수 들국화 / 천 상 병 산등선 외따른 데, 애기 들국화. 바람도 없는데 괜히 몸을 뒤뉘인다. 가을은 다시 올 테지. 다시올까? 나와 네 외로운 마음, 지금처럼 순하게 겹친 이 순간..... *1930년 일본에서 출생 *1945년 김춘수 시인 주선으로 문예지에 추천됨 *1954년 서울대 상과대 수료 *1971년 유고시집 발간 *시집 *1993년 4월 28일 별세. 문학이야기/명시 2021.11.05
의자 / 이정록 그림 / 김 연 제 의자 / 이정록 병원에 갈 채비를 하며 어머니께서 한 소식 던지신다 허리가 아프니까 세상이 다 의자로 보여야 꽃도 열매도, 그게 다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여 주말엔 아버지 산소 좀 다녀와라 그래도 큰애 네가 아버지한테는 좋은 의자 아녔냐 이따가 침 맞고 와서는 참외밭에 지푸라기라도 깔고 호박에 똬리도 받쳐야겠다 그것들도 식군데 의자를 내줘야지 싸우지 말고 살아라 결혼하고 애 낳고 사는 게 별거냐 그늘 좋고 풍경 좋은데 의자 몇 개 내놓는 거여 * 이정록 시집 / 의자 문학이야기/명시 2021.11.04
아버지의 그늘 / 신경림 그림 / 원 효 준 아버지의 그늘 / 신경림 툭하면 아버지는 오밤중에 취해서 널브러진 색시를 업고 들어왔다. 어머니는 입을 꾹 다문 채 술국을 끓이고 ... 할머니는 집안이 망했다고 종주먹질을 해댔지만, 며칠이고 집에서 빠져나가지 않는 값싼 향수내가 나는 싫었다. 아버지는 종종 장바닥에서 품삯을 못 받은 광부들한테 멱살을 잡히기도 하고, 그들과 어울려 핫바지춤을 추기도 했다. 빚 받으러 와 사랑방에 죽치고 앉아 내게 술과 담배 심부름을 시키는 화약 장수도 있었다. 아버지를 증오하면서 나는 자랐다. 아버지가 하는 일은 결코 하지 않겠노라고 이것이 내 평생의 좌우명이 되었다. 나는 빚을 질 일을 하지 않았다. 취한 색시를 업고 다니지 않았고, 노름으로 밤을 지새지 않았다. 아버지는 .. 문학이야기/명시 2021.11.03
가을 들녘에 서서 / 홍 해 리 그림 / 유 복 자 가을 들녘에 서서 / 홍 해 리 눈멀면 아름답지 않은 것 없고 귀먹으면 황홀치 않은 소리 있으랴 마음 버리면 모든 것이 가득하니 다 주어버리고 텅 빈 들녘에 서면 눈물겨운 마음자리도 스스로 빛이나네 늦 가을 / 홍 해 리 이제 그만 돌아서자고 돌아가자고 바람은 젖은 어깨 다독이는데 옷을 벗은 나무는 막무가내 제자리에 마냥 서 있었다 찌르레기 한 마리 울고 있었다 늦가을이었다 *충북 청원 출생 *고려대 영문과 졸업(1964) *현재 대표 *시집 문학이야기/명시 2021.11.02
꽃의 이유 / 마 종 기 그림 / 박 송 연 꽃의 이유 / 마 종 기 꽃이 피는 이유를 전에는 몰랐다 꽃이 필 적마다 꽃나무 전체가 작게 떠는 것도 몰랐다 사랑해 본 적이 있는가 누가 물어보면 어쩔까 꽃이 지는 이유는 전에는 몰랐다 꽃이 질 적마다 나무 주위에는 잠에서 깨어나는 물 젖은 바람소리 *1939년 일본 출생 *서울대 대학원 졸업 *1959년 현대문학 시 등단 *시집 *수상경력 -한국문학 작가상 -편운 문학상 -이산 문학상 -동서 문학상 문학이야기/명시 2021.11.01
국화 차를 달이며 / 문 성 해 그림 / 국중길 국화 차를 달이며 / 문 성 해 국화 우러난 물을 마시고 나는 비로소 사람이 된다 나는 앞으로도 도저히 이런 맛과 향기의 꽃처럼은 아니 될 것 같고 또 동구 밖 젖어드는 어둠 향해 저리 컴컴히 짖는 개도 아니 될 것 같고 나는 그저 꽃잎이 물에 불어서 우러난 해를 마시고 새를 마시고 나비를 모시는 사람이니 긴 장마 속에 국화가 흘리는 빗물을 다 받아 모시는 땅처럼 저녁 기도를 위해 가는 향을 피우는 사제처럼 텅텅 울리는 긴 복도처럼 고요하고도 깊은 가슴이니 *영남대 국문과 졸업 *1998년 매일 신문 신춘문예 *200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 *시집 문학이야기/명시 2021.10.31
개구리 구슬치기 / 장두현 그림 / 김 인 화 개구리 구슬치기 / 장두현 (2001 강원일보 동시 당선작) 개구리가 연잎 위에서 구슬치기 놀이를 한다 자, 받아라 잘 못 튀긴 구슬이 그만 연못에 퐁당 빠져버렸네 개구리가 구슬을 찾겠다며 물속으로 첨벙 뛰어들었는데 어디 있는지 못 찾겠다고 개굴개굴 지금껏 울고만 있습니다 문학이야기/명시 2021.10.30
대결 / 이 상 국 그림 / 김 정 수 대결 / 이 상 국 큰 눈 온 날 아침 부러져나간 소나무를 보면 눈부시다 그들은 밤새 뭔가와 맞서다가 무참하게 꺾였거나 누군가에게 자신을 바치기 위하여 공손하게 몸을 내맡겼던 게 아닐까 조금씩 조금씩 쌓이는 눈의 무게를 받으며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지점에 이르기까지 나무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저 빛나는 자해(自害) 혹은 아름다운 마감 나는 때때로 그렇게 세상 밖으로 나가고 싶다 이상국 시집 / 국수가 먹고 싶다 문학이야기/명시 2021.10.29
무령왕비의 은팔찌 < 다리多利의 말> / 문 효 치 그림 / 이 보 석 무령왕비의 은팔찌 / 문 효 치 왕비여 여인이여 내가 그대를 사모하건만 그대는 너무 멀리 계십니다 같은 이승이라지만 우리 사이에는 까마득히 넓은 강이 흐릅니다 그대를 향하여 사위어가는 정한 목숨 내가 만드는 것은 한낱 팔찌가 아니라 그대에게 달려가는 내 그리움의 몸부림입니다 내가 빚은 것은 한낱 용의 형상이 아니라 그대에게 건너가려는 내 사랑의 용틀임입니다 비늘 하나를 새겨 넣고 먼 산 보며 한숨 집니다 다시 발톱 하나 새겨 넣고 달을 보며 피울음 웁니다 내 살을 깎아 용의 살을 붙이고 내 뼈를 빼어내어 용의 뼈를 맞춥니다 왕비여, 여인이여. 그대에게 날려 보내는 용은 작은 손목에 머무르지 않고 그대 몸뚱이에 휘감길 것이며 마.. 문학이야기/명시 2021.10.28
찬란 / 이병률 그림 / 임 정 순 찬란 / 이병률 겨우내 아무 일 없던 화분에서 잎이 나니 찬란하다 흙이 감정을 참지 못하니 찬란하다 감자에서 난 싹을 화분에 옮겨 심으며 손끝에서 종이 넘기는 소리를 듣는 것도 오래도록 내 뼈에 방들이 우는 소리 재우는 일도 찬란이다 살고자 하는 일이 찬란이었으므로 의자에 먼지 앉는 일은 더 찬란이리 찬란하지 않으면 모두 뒤처지고 광장에서 멀어지리 지난밤 남쪽의 바다를 생각하던 중에 등을 켜려다 전구가 나갔고 검푸른 어둠이 굽이쳤으나 생각만으로 겨울을 불렀으니 찬란하다 실로 이기고 지는 깐깐한 생명들이 뿌리까지 피곤한 것도 햇빛의 가랑이 사이로 북회귀선과 남회귀선이 만나는 것도 무시무시한 찬란이다 시집 / 어쩌면 별들이 너의 슬픔을.. 문학이야기/명시 2021.10.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