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문학이야기/명시 966

들국화 / 천 상 병

그림 / 김 정 수 ​ ​ ​ ​ 들국화 / 천 상 병 ​ ​ ​ 산등선 외따른 데, 애기 들국화. ​ 바람도 없는데 괜히 몸을 뒤뉘인다. ​ 가을은 다시 올 테지. ​ 다시올까? 나와 네 외로운 마음, 지금처럼 순하게 겹친 이 순간..... ​ ​ ​ *1930년 일본에서 출생 *1945년 김춘수 시인 주선으로 문예지에 추천됨 *1954년 서울대 상과대 수료 *1971년 유고시집 발간 *시집 *1993년 4월 28일 별세. ​ ​ ​ ​ ​

의자 / 이정록

그림 / 김 연 제 ​ ​ ​ ​​ 의자 / 이정록 병원에 갈 채비를 하며 어머니께서 한 소식 던지신다 허리가 아프니까 세상이 다 의자로 보여야 꽃도 열매도, 그게 다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여 주말엔 아버지 산소 좀 다녀와라 그래도 큰애 네가 아버지한테는 좋은 의자 아녔냐 이따가 침 맞고 와서는 참외밭에 지푸라기라도 깔고 호박에 똬리도 받쳐야겠다 그것들도 식군데 의자를 내줘야지 싸우지 말고 살아라 결혼하고 애 낳고 사는 게 별거냐 그늘 좋고 풍경 좋은데 의자 몇 개 내놓는 거여 ​ ​ * 이정록 시집 / 의자 ​ ​ ​ ​ ​ ​

아버지의 그늘 / 신경림

그림 / 원 효 준 ​ ​ ​ 아버지의 그늘 / 신경림 ​ ​ ​ 툭하면 아버지는 오밤중에 취해서 널브러진 색시를 업고 들어왔다. 어머니는 입을 꾹 다문 채 술국을 끓이고 ... 할머니는 집안이 망했다고 종주먹질을 해댔지만, 며칠이고 집에서 빠져나가지 않는 값싼 향수내가 나는 싫었다. 아버지는 종종 장바닥에서 품삯을 못 받은 광부들한테 멱살을 잡히기도 하고, 그들과 어울려 핫바지춤을 추기도 했다. 빚 받으러 와 사랑방에 죽치고 앉아 내게 술과 담배 심부름을 시키는 화약 장수도 있었다. ​ 아버지를 증오하면서 나는 자랐다. 아버지가 하는 일은 결코 하지 않겠노라고 이것이 내 평생의 좌우명이 되었다. 나는 빚을 질 일을 하지 않았다. 취한 색시를 업고 다니지 않았고, 노름으로 밤을 지새지 않았다. 아버지는 ..

가을 들녘에 서서 / 홍 해 리

그림 / 유 복 자 ​ ​ ​ ​ 가을 들녘에 서서 / 홍 해 리 ​ ​ ​ ​ 눈멀면 아름답지 않은 것 없고 귀먹으면 황홀치 않은 소리 있으랴 마음 버리면 모든 것이 가득하니 다 주어버리고 텅 빈 들녘에 서면 눈물겨운 마음자리도 스스로 빛이나네 ​ ​ ​ ​ ​ ​ ​ 늦 가을 / 홍 해 리 ​ ​ 이제 그만 돌아서자고 돌아가자고 바람은 젖은 어깨 다독이는데 옷을 벗은 나무는 막무가내 제자리에 마냥 서 있었다 ​ 찌르레기 한 마리 울고 있었다 ​ 늦가을이었다 ​ ​ ​ *충북 청원 출생 *고려대 영문과 졸업(1964) *현재 대표 *시집 ​ ​

꽃의 이유 / 마 종 기

그림 / 박 송 연 ​ ​ ​ ​ 꽃의 이유 / 마 종 기 ​ ​ 꽃이 피는 이유를 전에는 몰랐다 꽃이 필 적마다 꽃나무 전체가 작게 떠는 것도 몰랐다 ​ 사랑해 본 적이 있는가 누가 물어보면 어쩔까 ​ 꽃이 지는 이유는 전에는 몰랐다 꽃이 질 적마다 나무 주위에는 잠에서 깨어나는 물 젖은 바람소리 ​ ​ ​ ​ ​ *1939년 일본 출생 *서울대 대학원 졸업 *1959년 현대문학 시 등단 *시집 *수상경력 -한국문학 작가상 -편운 문학상 -이산 문학상 -동서 문학상 ​ ​ ​ ​ ​

국화 차를 달이며 / 문 성 해

그림 / 국중길 ​ ​ ​ ​ ​ 국화 차를 달이며 / 문 성 해 ​ ​ ​ 국화 우러난 물을 마시고 나는 비로소 사람이 된다 나는 앞으로도 도저히 이런 맛과 향기의 꽃처럼은 아니 될 것 같고 또 동구 밖 젖어드는 어둠 향해 저리 컴컴히 짖는 개도 아니 될 것 같고 ​ 나는 그저 꽃잎이 물에 불어서 우러난 해를 마시고 새를 마시고 나비를 모시는 사람이니 ​ 긴 장마 속에 국화가 흘리는 빗물을 다 받아 모시는 땅처럼 저녁 기도를 위해 가는 향을 피우는 사제처럼 텅텅 울리는 긴 복도처럼 고요하고도 깊은 가슴이니 ​ ​ ​ ​ *영남대 국문과 졸업 *1998년 매일 신문 신춘문예 *200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 *시집 ​ ​ ​ ​

대결 / 이 상 국

그림 / 김 정 수 ​ ​ ​ ​ 대결 / 이 상 국 ​ ​ ​ ​ 큰 눈 온 날 아침 부러져나간 소나무를 보면 눈부시다 ​ 그들은 밤새 뭔가와 맞서다가 무참하게 꺾였거나 누군가에게 자신을 바치기 위하여 공손하게 몸을 내맡겼던 게 아닐까 ​ 조금씩 조금씩 쌓이는 눈의 무게를 받으며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지점에 이르기까지 나무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 저 빛나는 자해(自害) 혹은 아름다운 마감 ​ 나는 때때로 그렇게 세상 밖으로 나가고 싶다 ​ ​ 이상국 시집 / 국수가 먹고 싶다 ​ ​ ​

무령왕비의 은팔찌 < 다리多利의 말> / 문 효 치

​ 그림 / 이 보 석 ​ ​ 무령왕비의 은팔찌 / 문 효 치 ​ ​ 왕비여 여인이여 내가 그대를 사모하건만 그대는 너무 멀리 계십니다 ​ 같은 이승이라지만 우리 사이에는 까마득히 넓은 강이 흐릅니다 ​ 그대를 향하여 사위어가는 정한 목숨 내가 만드는 것은 한낱 팔찌가 아니라 그대에게 달려가는 내 그리움의 몸부림입니다 ​ 내가 빚은 것은 한낱 용의 형상이 아니라 그대에게 건너가려는 내 사랑의 용틀임입니다 ​ 비늘 하나를 새겨 넣고 먼 산 보며 한숨 집니다 ​ 다시 발톱 하나 새겨 넣고 달을 보며 피울음 웁니다 내 살을 깎아 용의 살을 붙이고 내 뼈를 빼어내어 용의 뼈를 맞춥니다 ​ 왕비여, 여인이여. 그대에게 날려 보내는 용은 작은 손목에 머무르지 않고 그대 몸뚱이에 휘감길 것이며 마..

찬란 / 이병률

그림 / 임 정 순 ​ ​ ​ 찬란 / 이병률 ​ ​ ​ 겨우내 아무 일 없던 화분에서 잎이 나니 찬란하다 흙이 감정을 참지 못하니 찬란하다 ​ 감자에서 난 싹을 화분에 옮겨 심으며 손끝에서 종이 넘기는 소리를 듣는 것도 오래도록 내 뼈에 방들이 우는 소리 재우는 일도 찬란이다 ​ 살고자 하는 일이 찬란이었으므로 의자에 먼지 앉는 일은 더 찬란이리 찬란하지 않으면 모두 뒤처지고 광장에서 멀어지리 ​ 지난밤 남쪽의 바다를 생각하던 중에 등을 켜려다 전구가 나갔고 검푸른 어둠이 굽이쳤으나 생각만으로 겨울을 불렀으니 찬란하다 ​ 실로 이기고 지는 깐깐한 생명들이 뿌리까지 피곤한 것도 햇빛의 가랑이 사이로 북회귀선과 남회귀선이 만나는 것도 무시무시한 찬란이다 ​ ​ ​ ​ ​ 시집 / 어쩌면 별들이 너의 슬픔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