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문학이야기/명시 966

달은 추억의 반죽 덩어리 / 송찬호​

그림 / 이고르 베르디쉐프 (러시아) ​ ​ ​ ​ 달은 추억의 반죽 덩어리 / 송찬호 ​ ​ 누가 저기다 밥을 쏟아 놓았을까 모락모락 밥 집 위로 뜨는 희망처럼 늦은 저녁 밥상에 한 그릇 달을 띄우고 둘러앉을 때 달을 깨뜨리고 달 속에서 떠오르는 노오란 달 ​ 달은 바라만 보아도 부풀어 오르는 추억의 반죽 덩어리 우리가 이 지상까지 흘러오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빛을 잃을 것이냐 ​ 먹고 버린 달 껍질이 조각조각 모여 달의 원형으로 회복되기까지 어기여차, 밤을 굴려 가는 달비처럼 빛나는 단단한 근육 덩어리 달은 꽁꽁 뭉친 주먹밥이다. 밥집 위에 뜬 희망처럼, 꺼지지 않는 ​ ​ ​ 시집 / 어느 가슴엔들 시가 꽃피지 않으랴 ​ ​

시월에 / 문태준

그림 /정 영 희 ​ ​ ​ 시월에 / 문태준 ​ ​ 오이는 아주 늙고 토란잎은 매우 시들었다 산밑에는 노란 감국화가 한 무더기 해죽, 해죽 웃는다 웃음이 가시는 입가에 잔주름이 자글자글하다 꽃빛이 사그라들고 있다 들길을 걸어가며 한 팔이 뺨을 어루만지는 사이에도 다른 팔이 계속 위아래로 흔들리며 따라왔다는 걸 문득 알았다 집에 와 물에 찬밥을 둘둘 말아 오물오물거리는데 눈구멍에서 눈물이 돌고 돌다 시월은 헐린 제비집 자리 같다 아, 오늘은 시월처럼 집에 아무도 없다 ​ ​ ​ ​ 시집 / 문태준 ​ ​ ​ ​

국화에 관하여 (국화 시 모음)

그림 / 김 민 정 ​ ​ 국화 옆에서 / 서 정 주 ​ ​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하여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하여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머언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에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이 오지 않았나 보다 ​ ​ ​ ​ 국화가 피는 것은 / 길 상 호 ​ 바람 차가운 날 국화가 피는 것은, 한 잎 한 잎 꽃잎을 펼 때마다 품고 있던 향기 날실로 뽑아 바람의 가닥에 엮어 보내는 것은, 생의 희망을 접고 떠도는 벌들 불러모으기 위함이다 그 여린 날갯짓에 한 모금의 달콤한 기억을 남겨 주려는 이유에서이다 그리하여 마당 ..

​가을 / 송찬호

그림 / 이 규 영 ​ ​ ​ ​ 가을 / 송찬호 ​ ​ ​ 딱! 콩꼬투리에서 튀어 나간 콩알이 가슴을 스치자, 깜짝 놀란 장끼가 건너편 숲으로 날아가 껑, 껑, 우는 서러운 가을이었다 ​ 딱! 콩꼬투리에서 튀어 나간 콩알이 엉덩이를 때리자, 초경이 비친 계집애처럼 화들짝 놀란 노루가 찔끔 피 한 방울 흘리며 맞은편 골짜기로 정신없이 달아나는 가을이었다 ​ 멧돼지 무리는 어제 그제 달밤에 뒹굴던 삼밭이 생각나, 외딴 콩밭쯤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지나치는 산비알 가을이었다 ​ 내년이면 이 콩밭도 묵정밭이 된다고 하였다 허리 구부정한 콩밭 주인은 이제 산등성이 동그란 백도라지 무덤이 더 좋다 하였다 그리고 올 소출이 황두 두말 가웃은 된다고 빙그레 웃었다 ​ 그나저나 아직 볕이 좋아 여직 도리깨를 맞지 않은 ..

시월 / 목 필 균

그림 / 김 은 숙 ​ ​ ​ 시월 / 목 필 균 ​ ​ 파랗게 날 선 하늘에 삶아 빨은 이부자리 홑청 하얗게 널면 ​ 허물 많은 내 어깨 밤마다 덮어주던 온기가 눈부시다 ​ 다 비워진 저 넓은 가슴에 얼룩진 마음도 거울처럼 닦아보는 시월 ​ ​ ​ 1946년 함양 출생 춘천교육대학졸업, 성신여대교육대학원졸업 ​ 1972년 신춘문예 단편 강원일보당선 1975년 신인문학상 중편소설 세대지 시집 : 풀꽃 술잔 나비 ​ ​ ​ ​ ​ ​

벽 / 정 호 승

그림 / 김 정 수 ​ ​ ​ 벽 / 정 호 승 ​ ​ ​ 나는 이제 벽을 부수지 않는다 따스하게 어루만질 뿐이다 벽이 물렁물렁해질 때까지 어루만지다가 마냥 조용히 웃을 뿐이다 웃다가 벽 속으로 걸어갈 뿐이다 벽 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가면 봄눈 내리는 보리밭길을 걸을 수 있고 섬과 섬 사이로 작은 배들이 고요히 떠가는 봄바다를 한없이 바라볼 수 있다 ​ ​ 나는 한때 벽 속에는 벽만 있는 줄 알았다 나는 한때 벽 속의 벽까지 부수려고 망치를 들었다 망치로 벽을 내리칠 때마다 오히려 내가 벽이 되었다 나와 함께 망치로 벽을 내리치던 벗들도 결국 벽이 되었다 부술수록 더욱 부서지지 않는 무너뜨릴수록 더욱 무너지지 않는 벽은 결국 벽으로 만들어지는 벽이었다 ​ ​ 나는 이제 벽을 무너뜨리지 않는다 벽을 타고..

울음이 타는 가을 강 / 박 재 삼

그림 / 김 진 숙 ​ ​ ​ 울음이 타는 가을 강 / 박 재 삼 ​ ​ 마음도 한 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일 때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 가을 햇볕으로나 동무 삼아 따라가면 어느새 등성이에 이르러 눈물나고나 ​ 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 해질녘 울음이 타는 가을강을 보것네 ​ 저것 봐, 저것 봐 네보담도 내보담도 그 기쁜 첫사랑 산골 물소리 사라지고 그 다음 사랑 끝에 생긴 울음까지 녹아나고 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 와 가는 소리 죽은 가을강을 처음 보것네. ​ ​ 시집 :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 ​

병정들 / 오 경 은

그림 / 김 경 화​ ​ ​ ​ 병정들 / 오 경 은 ​ 성당 천장에 닿을 수 있을까 나를 몇 토막 쌓아야 ​ 맨 뒷줄에서 바라본 신부님은 플라스틱 병정 같고 ​ 죄랑 조금 더 친해진다 미사 내내 앉았다 일어났다 고장난 스프링처럼 ​ 허벅지 사이에 땀 차서 싫죠 신부님도 옷 벗고 싶죠 ​ 꼬리를 치켜올린다 벤치 사이사이를 돌아다니며 주인 없는 고양이가 ​ 죄는 언제나 일인용이어서 ​ 옆에 앉은 사람과 포옹을 나눌 때마다 죄는 자꾸 다정해지지 덕담처럼 ​ 미사포로 코를 풀어도 용서해줄 거지? ​ 성당을 나서자 몰아치는 햇빛 ​ 고양이가 수풀 사이로 뛰어들었다 찐득거리는 그림자를 불쾌해하는 기색없이 ​ ​ ​ *고려대학교 문예창작과 졸업 *동 대학원 박사과정 재학 중 *2018년 중앙신인 문학상 시 부문 당..

사랑은 조용히 오는 것 / 글로리아 밴더빌트

그림 / 김 복 연​ ​ ​ 사랑은 조용히 오는 것 / 글로리아 밴더빌트 ​ ​ 사랑은 조용히 오는 것 외로운 여름과 거짓 꽃이 시들고도 기나긴 세월이 흐를 때 사랑은 천천히 오는 것 얼어붙은 물속으로 파고드는 밤하늘의 총총한 별처럼 조용히 내려앉는 눈과같이 조용히 천천히 땅속에 뿌리박는 풀처럼 사랑은 더디고도 종용한 것 내리다가 흩날리는 눈처럼 사랑은 살며시 뿌리로 스며드는 것 씨앗이 싹트듯 달이 커지듯 천천히 ​ ​ ​ 시집 / 매일 시 한 잔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