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문학이야기/명시

시월에 / 문태준

푸른 언덕 2021. 10. 14. 18:22

그림 /정 영 희

 

시월에 / 문태준

 

오이는 아주 늙고 토란잎은 매우 시들었다

산밑에는 노란 감국화가 한 무더기 해죽, 해죽 웃는다

웃음이 가시는 입가에 잔주름이 자글자글하다

꽃빛이 사그라들고 있다

들길을 걸어가며 한 팔이 뺨을 어루만지는 사이에도

다른 팔이 계속 위아래로 흔들리며 따라왔다는 걸

문득 알았다

집에 와 물에 찬밥을 둘둘 말아 오물오물거리는데

눈구멍에서 눈물이 돌고 돌다

시월은 헐린 제비집 자리 같다

아, 오늘은 시월처럼 집에 아무도 없다

 

시집 / 문태준 <가재미> <문학과지성사,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