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문학이야기/명시

국화에 관하여 (국화 시 모음)

푸른 언덕 2021. 10. 12. 20:14

그림 / 김 민 정

 

 

국화 옆에서 / 서 정 주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하여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하여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머언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에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이 오지 않았나 보다

 

 

국화가 피는 것은 / 길 상 호

 

바람 차가운 날

국화가 피는 것은,

한 잎 한 잎 꽃잎을 펼 때마다

품고 있던 향기 날실로 뽑아

바람의 가닥에 엮어 보내는 것은,

생의 희망을 접고 떠도는 벌들

불러모으기 위함이다

그 여린 날갯짓에

한 모금의 달콤한 기억을

남겨 주려는 이유에서이다

그리하여 마당 한편에

햇빛처럼 밝은 꽃들이 피어

지금은 윙윙거리는 저 소리들로

다시 살아 오르는 오후,

저마다 누런 잎을 접으면서도

억척스럽게 국화가 피는 것은

아직 접어서는 안 될

작은 날개들이 저마다의 가슴에

움트고 있기 때문이다

 

 

모두가 들국화 시인이 되게 하라 / 김 영 남

 

이번 가을은 농부들 마음 위에서

귀뚜라미 울음소리가 데굴데굴 굴러가게 하라.

그리하여 섬돌 아래에서 사발로 줍게 하라.

튕겨낼 듯 댓가지 휘고 있는 가을 과일들도

그 꽉 찬 결실만 생각하며 따게 하라.

혹 깨물지 못할 쭈그린 얼굴이 있거든

그것은 저 빈 들녘의 허수아비 몫으로만 남게 하라.

더 이상 지는 잎에까지 상처받지 않고

푸른 하늘과 손잡고 가고 있는 길 옆 들국화처럼

모두가 시인이 되어서 돌아오게 하라.

 

 

들국화 / 김 용 택

 

나는 물기만 조금 있으면 된답니다.

아니, 물기가 없어도 조금은 견딜 수 있지요

때때로 내 몸에 이슬이 맺히고

아침 안개라도 내 몸을 지나가면 됩니다.

기다리면 하늘에서

아, 하늘에서 비가 오기도 한답니다.

강가에 바람이 불고

해가 가고 달이 가고 별이 지며

나는 자란답니다.

그렇게 세월이 가고

찬 바람이 불면

당신이 먼데서 날 보러 오고 있다는

그 기다림으로

나는 높은 언덕에 서서 하얗게 피어납니다.

당신은 내게

나는 당신에게

단 한번 피는 꽃입니다.

 

 

 

소세양 판서를 보내며 / 황진희

 

달빛 아래 오동잎 모두 지고

서리 맞은 들국화 노랗게 피었구나

누각은 높은 하늘에 닿고

오가는 술잔은 취하여도 끝이 없네

흐르는 물은 거문고와 같이 차고

매화는 피리에 서려 향기로워라

내일 아침 님 보내고 나면

사무치는 정 물결처럼 끝이 없어리

 

 

노란 국화 한 송이 / 용 혜 원

 

가을에 사랑하는 이를 만날 때는

노란 국화 한 송이를

선물하세요.

은은하게 퍼지는 향기가

두 사람을 더 가까이

있고 싶어지게 만들어줄 거예요

깊어만 가는 가을밤

서로에게 점점 더 깊이 빠져 들어가고

불어오는 바람도 포근한

행복에 감싸게 해줄 거예요

밤하늘의 별들도

그대들을 위해 빛을 발하고

밤길을 밝혀주는 가로등도

헤어지기 싫어하는

두 사람의 마음을 알고 있을 거예요.

 

 

들국화 / 나 태 주

 

바람 부는 등성이에

혼자 올라서

두고 온 옛날은

생각 말자고,

아주 아주 생각 말자고.

갈꽃 핀 등성이에

혼자 올라서

두고 온 옛날은

잊었노라고,

아주 아주 잊었노라고.

구름이 헤적이는

하늘을 보며

어느 사이

두 눈에 고이는 눈물.

꽃잎에 젖는 이슬.

 

 

들국화 / 곽 재 구

 

사랑의 날들이

올 듯 말 듯

기다려온 꿈들이

필 듯 말 듯

그래도 가슴속에 남은

당신의 말 한마디

하루종일 울다가

무릎걸음으로 걸어간

절벽 끝에서

당신은 하얗게 웃고

오래 된 인간의 추억 하나가

한 팔로 그 절벽에

끝끝내 매달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국화잎 베개 / 조 용 미

 

국화잎 베개를 베고 누웠더니

몸에서 얼핏얼핏 산국 향내가 난다

지리산 자락 어느 유허지 바람과 햇빛의 기운으로 핀

노란 산국을 누가 뜯어주었다

그늘에 곱게 펴서 그걸 말리는 동안

아주 고운 잠을 자고 싶었다

하얀 속을 싸서 만든 베개에

한 생각이 일어날 때마다

아픈 머릴 누이고 국화잎 잠을 잔다

한 생각을 죽이면 다른 한 생각이 또 일어나

마른 산국 향을

그 생각 위에 또 얹는다

몸에서 자꾸 산국 향내가 난다

나는 한 생각을 끌어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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