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문학이야기/명시 966

여행 2 / 나 태 주

그림 / 임 창 순 ​ ​ ​ 여행 2 / 나 태 주 ​ ​ ​ 예쁜 꽃을 보면 망설이지 말고 예쁘다고 말해야 한다 ​ 사랑스런 여자를 만나면 미루지 말고 사랑스럽다고 말해주어야 한다 ​ 이다음에 예쁜 꽃을 다시 볼 수 있을 거라고 사랑스러운 여자를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고 믿어서는 안 된다 ​ 우리네 하루하루 순간순간은 여행길 두 번 다시 되풀이할 수 없는 오직 한 번뿐인 여행이니까. ​ ​ ​ 시집 / 나태주 대표 시선집 ​ ​ ​ ​ ​

단단하지 않은 마음 / 강 우 근 < 2021,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

그림 / 안 영 숙 ​ ​ ​ ​ 단단하지 않은 마음 / 강 우 근 ​ 별일 아니야,라고 말해도 그건 보이지 않는 거리의 조약돌처럼 우리를 넘어뜨릴 수 있고 작은 감기야,라고 말해도 창백한 얼굴은 일회용 마스크처럼 눈앞에서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나는 어느 날 아침에 눈병이 걸렸고, 볼에 홍조를 띤 사람이 되었다가 대부분의 사람처럼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고 있다. 병은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밥을 먹고, 버스를 타고, 집으로 걸어오는 우리처럼 살아가다 죽고 만다. 말끔한 아침은 누군가가 소독한 병실처럼 오고 있다 저녁 해가 기울 때 테이블과 의자를 내놓고 감자튀김을 먹는 우리들은 축구 경기를 보며 말한다. “정말 끝내주는 경기였어” 나는 숨을 고른 채로 숨을 고르는..

​석류 / 복 효 근

그림 / 송 춘 희 ​ ​ ​ 석류 / 복 효 근 ​ ​ 누가 던져놓은 수류탄만 같구나 불발이긴 하여도 서녘 하늘까지 붉게 탄다 네 뜰에 던져놓았던 석류만한 내 심장도 그랬었거니 불발의 내 사랑이 서천까지 태우는 것을 너만 모르고 나만 모르고 어금니 사려물고 안으로만 폭발하던 수백 톤의 사랑 혹은 적의 일지도 모름 ​ ​ 복효근 시집 / 꽃 앞에서 바지춤을 내리고 묻다 ​ ​ ​

지울 수 없는 얼굴 / 고 정 희

이재효 갤러리 ​ ​ ​ 지울 수 없는 얼굴 / 고 정 희 ​ ​ 냉정한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얼음 같은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불 같은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무심한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징그러운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아니야 부드러운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그윽한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따뜻한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내 영혼의 요람 같은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샘솟는 기쁨 같은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아니야 아니야 사랑하고 사랑하고 사랑하는 당신이라 썼다가 이 세상 지울 수 없는 얼굴 있음을 알았습니다 ​ ​ * 고정희 시집 ​ ​ ​ ​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 함 민복

그림 / 강 계 진 ​ ​ ​ ​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 함 민 복 ​ ​ 달빛과 그림자의 경계로 서서 담장을 보았다. 집 안과 밖의 경계인 담장에 화분이 있고 꽃의 전생과 내생 사이에 국화가 피었다. ​ 저 꽃은 왜 흙의 공중섬에 피어 있을까 ​ 해안가 철책에 초병의 귀로 매달린 돌처럼 도둑의 침입을 경보하기 위한 장치인가 내 것과 내 것 아님의 경계를 나눈 자가 행인들에게 시위하는 완곡한 깃발인가 집의 안과 밖이 꽃의 향기를 흠향하려 건배하는 순간인가 ​ 눈물이 메말라 달빛과 그림자의 경계로 서지 못하는 날 꽃철책이 시들고 나와 세계의 모든 경계가 무너지리라 ​ ​ 시집 /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 ​ ​ ​

야생화 / 박 효 신

그림 / 김 정 수 ​ ​ ​ ​ 야생화 / 박 효 신 ​ ​ 하얗게 피어난 얼음꽃 하나가 달가운 바람에 얼굴을 내밀어 아무 말 못했던 이름도 몰랐던 지나간 날들에 눈물이 흘러 ​ 차가운 바람에 숨어 있다 한줄기 햇살에 몸 녹이다 그렇게 너는 또 한번 내게 온다 ​ 좋았던 기억만 그리운 마음만 니가 떠나간 그길 위에 이렇게 남아 서 있다 잊혀질 만큼만 괜찮을 만큼만 눈물 머금고 기다린 떨림 끝에 다시 나를 피우리라 ​ 사랑은 피고 또 지는 타버리는 불꽃 빗물에 젖을까 두 눈을 감는다 ​ 어리고 작았던 나의 맘에 눈부시게 빛나던 추억속에 그렇게 너를 또 한번 불러본다 ​ 좋았던 기억만 그리운 마음만 니가 떠나간 그 길위에 이렇게 남아 서 있다 잊혀질 만큼만 괜찮을 만큼만 눈물 머금고 기다린 떨림 끝에 나는..

풍경(風磬) / 목 필 균

​ ​ 풍경(風磬) / 목 필 균 ​ ​ ​ 허공을 유영하며 평생을 눈뜨고 살아도 깨닫음은 허공만 맴도네 ​ 깨어나라 깨어나라 깨어나라 ​ 바람이 부서지며 파열되는 음소들 깊은 산사 ​ 어느 추녀 끝에 매달려 털어내다 지친 마른 비늘 ​ 어느 날 문득 가슴 속 네가 나이려니 내가 너 이려니 묻다가 대답하다 ​ 그렇게 한 세월 매달려 산다 ​ ​ ​ ​ ​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 류 시 화​

그림 / 이고르 베르디쉐프 ​ ​ ​ ​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 류 시 화​ ​ ​ 물 속에는 물만 있는 것이 아니다 ​ 하늘에는 그 하늘만 있는 것이 아니다 ​ 그리고 내 안에는 나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 내 안에 있는 이여 내 안에서 나를 흔드는 이여 ​ 물처럼 하늘처럼 내 깊은 곳 흘러서 은밀한 내 꿈과 만나는 이여 ​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 ​ ​ ​ 류시화 시집 / 그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 ​ ​ ​

의자 / 이 정 록

그림 / 이 소 영 ​ ​ ​ ​ 의자 / 이 정 록 ​ ​ ​ 병원에 갈 채비를 하며 어머니께서 한 소식 던지신다 ​ 허리가 아프니까 세상이 다 의자로 보여야 꽃도 열매도, 그게 다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여 ​ 주말엔 아버지 산소 좀 다녀와라 그래도 큰애 네가 아버지한테는 좋은 의자 아녔냐 ​ 이따가 침 맞고 와서는 참외밭에 지푸라기도 깔고 호박에 똬리도 받쳐야겠다 그것들도 식군데 의자를 내줘야지 ​ 싸우지 말고 살아라 결혼하고 애낳고 사는 게 별거냐 그늘 좋고 풍경 좋은 데다가 의자 몇 개 내놓는 거여 ​ ​ ​ ​ *이정록시집 / 의자 ​ ​ ​ ​ ​

바람은 말라버린 꽃 / 황 은 경

그림 / 이 영 주 ​ ​ ​ 바람은 말라버린 꽃 / 황 은 경 ​ ​ 바람을 맞고 우리는 건조한 사막의 여우가 됐어 바람에 널 잊게 되었고 우리는 모래에 안구를 씻으며 바람에 너를 잡고 있던 마음을 오아시스 샘가에 걸어두고 바람에 의지하던 야자수 기둥 사이로 집 한 채 짓고 살았다 ​ ​ 그 바람에 마음 하나 날려 버렸다. ​ ​ 시들고 있다. 시들어 버린 그 마음은 마른 바람꽃 유성이 진 자리마다 저리게 걸어 온 길 ​ ​ 바람이 불어오면 슬픈 알람이 울어 바람에 세수하고 다시 깨어나는 가시 달린 눈 바람은 말라버린 꽃을 향해 쓰러지고 마음 하나 배웅하니 편하다. ​ ​ ​ 황은경 시집 / 생각의 비늘은 허물을 덥는다. ​ ​ ​ ​